“지금 상황은 오히려 현실의 암담함에 이상이 불을 비춰줬다고 생각해요.”
―카가 살아있다면 (미국은 북한 비핵화에 대해 비관론이 퍼지고 있는데) 남한 분위기는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경고하지 않을까요?
김 교수는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10년 보수정권이 회초리를 들고 북한을 변화시키려 했지만 핵·미사일 개발과 이른바 ’완성‘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방법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들렸다. 김 교수는 카의 이 대목을 정확히 이렇게 ‘편역’ 했다(그는 저서에서 과감한 의역을 했기 때문에 번역이 아니라 편역이라고 주장했다).
―‘20년의 위기’ 편역자로서 ‘좀 걱정스럽다’ 이런 말씀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군요.
“지금 정부 안에는 북한이 개과천선했다고 믿는 사람이 일부 있을지 몰라요. 아니면 애초부터 북한은 착한 쪽이었다고 믿는거나요. 그런데 그건 아니라는 거죠.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는 TV프로그램도 있던데, 세상에 좋은 개도 없습니다. 사실은 상황에 따라서 배고프면 사람을 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본성이 사악하고 그런 게 아니라, 상황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면, 그렇게 만든 사람들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거짓말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게 현실주의 아닌가요?
―북한이 대대로 개발해 온 핵미사일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가 많은데요?
이 질문에 대해 김 교수는 역시 자신이 번역한 그레이엄 엘리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결정의 엣센스: 쿠바 미사일 사태와 세계핵전쟁의 위기’를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우선 2018년 1월 1일 신년사 이후 김정은의 비핵화 협상을 엘리슨의 제1모델인 ‘합리적 행위자 모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국가이익을 추구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하는 이 모델에 따르면 국가안보를 위해 완성단계까지 끌고 간 핵·미사일을 선뜻 포기한다는 게 설명이 잘 안된다는 것. 하지만 제2모델인 ‘조직행태 모델’과 제3모델인 ‘정부정치 모델’에 따르면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북한 핵무장 프로그램은 적자예요.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핵이 북한을 안전하게 만들었나요? 아니면 국제적으로 위대하게 만들었나요? 아니면 투입 대비 산출이 있나요? 모두 아니거든요. 그래서 진작 그만두어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왜 완성까지 갔느냐. 일종의 조직논리인 2모델과 정치적 명분의 논리인 3모델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김정은 입장에서 할아버지,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완성까지 간 것이고 올해 들어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주장했던 목적이 달성됐으니까 이제 내려놓자’고 하는 겁니다. 핵무기는 군사적 무기가 아니라 정치적 무기이니까 어차피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니 평화협정이 됐건 종전선언이 됐건 우리가 안전을 보장 받으면,내려놔도 되는 거다. 그리고 이제 경제로 가자‘ 이렇게 내부 설득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회의론자들은 또 북한이 군사적 위기국면을 모면하고 핵은 그냥 보유한 채 제재를 약화시키려고 머리를 쓰고 있다고 의심합니다.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낙관하는 이유 세 가지가 있어요. 위기가 워낙 컸고, 북-미 정상이 개입됐고, 그래서 보수진영이 발목을 잡을 여지가 더 작아졌다는 거지요. 다만 걱정하는 것은 북한이 늘 그랬듯이 마지막 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북한 내 보수파랄까, 어떻게 해서든 핵을 꼭 가져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사보타지(sabotage)를 할 수도 있겠죠. 조직적인 관성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그게 제일 우려스러운 거예요. 요즘 강조하는 것은 북한이 파키스탄처럼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갖는 목표를 세우면 안 된다는 겁니다. 법률적인 비핵국가의 지위를 추구해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시절 소위 ’햇볕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의 공을 국가 정책이 아니라 정권에 돌렸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거는 국가의 공이지, 정권의 공이 아니거든요? 그 성과를 정권적 목적으로 쓰면, 반드시 야당이 발목을 잡게 돼 있습니다. 국론이 분열되기 때문에 동력을 잃어버리거든요. 문재인 대통령이 좀 참고, 민주당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고, ’이거는 국가 프로젝트다. 무슨 노벨 평화상 받는 데에 급급하지 않을 거다. 선거에 급급할 필요가 뭐가 있냐. 이건 국가 프로젝트로 합시다‘ 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