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무장읍성서 11점 쏟아져
전북 고창군 무장읍성에서 15일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이 출토된 비격진천뢰(점선 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417년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지은 무장읍성은 1911년 일제의 읍성 철폐령으로 헐리기 전까지 대규모 훈련청과 군기고를 보유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문화재청 제공
“좌병사 박진(?∼1597)이 경주성 밑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 안으로 쐈다. 왜적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지 못하여 구경하고, 밀고 굴려보기도 했다. 갑자기 포가 폭발하여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서 흩어지니 즉사한 사람이 30여 명이나 됐다. (중략) 왜적들은 드디어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의 전모를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에는 전쟁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짜릿한 전투장면이 나온다. 1592년 9월 왜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휘하의 군사들에게 함락당한 경주성을 탈환한 대목이다. 이 전투뿐 아니다. 한산도대첩과 진주성대첩, 행주대첩까지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를 거둔 주요한 전투의 배경에는 모두 비격진천뢰가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비밀병기 비격진천뢰가 전북 고창군 무장현 관아와 읍성(무장읍성·사적 제346호)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무장읍성 내부 동쪽 성벽 근처에서 비격진천뢰 11점을 비롯해 조선시대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 등을 발견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날 무장읍성에서 공개된 비격진천뢰는 군기고로 사용된 건물의 수혈(竪穴·구덩이) 유적에 6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머지 5점은 주변 퇴적층에서 발견됐다. 크기는 지름 21cm에 무게는 17∼18kg이다. 겉모습은 볼링공과 비슷하지만 사용되지 않은 폭탄이어서 내부에 화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지금까지 발견된 비격진천뢰는 총 6점인데 모두 폭발이 일어난 후 탄피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며 “원형 그대로 묻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병기사(兵器史)에 획기적인 유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격진천뢰 외부에는 포탄이 쉽게 터지고 폭발력도 강화하기 위해 공기구멍인 기공(氣孔)을 많이 만들었다. 호남문화재연구원 제공
다만 이번에 발견된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고종 시대의 포탄으로 추정된다. 무장읍성은 1894년 당시 전북 고창과 정읍지역을 중심으로 봉기했던 동학 농민군이 무력시위를 벌인 끝에 관군을 내쫓고, 점령한 곳이다. 윤덕향 호남문화재연구원장은 “19세기 양식의 조선기와도 함께 발견됐는데 당시 동학군의 위세에 눌린 관군이 읍성이 함락되기 전 포탄을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비격진천뢰가 1591년부터 300여 년간 조선 국방의 핵심적인 무기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고창=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