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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우경임]쓰러진 워킹맘 판사

입력 | 2018-11-23 03:00:00


“엄마는 나쁜 사람을 벌주기 위해 늦는 거란다.” 최근 주말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서울고등법원 이모 판사(42)는 초등생 아들 둘을 둔 워킹맘이다. 이 판사는 워킹맘 법조인들의 인터넷 카페에 “아이가 엄마,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적다고 한다”고 고민하며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한 달 전엔 ‘이제 새벽 3시가 넘어가면 몸이 힘들다. 내가 쓰러지면 누가 발견할까’라는 글도 남겼다.


▷딸 아내 엄마를 잃었을 가족들이 겪는 상실의 아픔에 감히 비할 순 없겠지만, 이 판사의 사연에 눈물이 고이지 않은 워킹맘은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상이 그림 그리듯 눈에 선해서다. 보통 판사 1명이 연간 600건의 사건을 처리하는데 매일 수천 쪽의 기록을 봐야 가능하다. 과중한 재판 업무 속에 아이를 키우느라 얼마나 뛰어다녔을까. 누군가 육아를 도왔겠지만 아이는 아프거나, 슬프거나 하는 결정적인 순간엔 엄마를 찾는다.

▷과거 과로사는 주로 40, 50대 남성들의 사망 원인이었다. 스트레스로 상승한 혈압이 심근경색, 뇌출혈의 원인이 된다. 워킹맘 과로사는 ‘금녀의 벽’을 넘은 여성 증가와 관련이 있다. 전문직, 고위직일수록 업무 강도가 높을 텐데 육아 부담을 안고 생존해야 한다. 최근 아세안 정상회의 담당이었던 외교부 김모 국장(48)도 싱가포르 호텔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현지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는 올 3월 첫 여성 지역국 담당 국장에 올랐다. 역시 초등생 아들을 둔 워킹맘인데 거의 한 달간 야근을 했던 모양이다.

▷이들과 함께 일한 동료들은 한결같이 “일이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아 몰랐다”고 했다. 시험 취업 승진 등 허들을 차례로 뛰어넘으며 ‘여자라서 안 돼’라는 말을 듣지 않고자 부단히 애썼을 것이다. 그렇게 달려왔어도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면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성공이 불가능해 보이는 허들을 만난다. 자꾸 뒤돌아보면서 워킹맘 스스로 뛰어넘기를 망설이게 되는 높은 허들이다. 양성평등 제도든 문화든 어서 정착돼 워킹맘에게 ‘함께 뛰어넘자’고 손을 내밀어 줬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