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영 경제부장
은행장들은 정권의 말만 잘 들으면 자리를 보존하며 막강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었다. 돈은 부족하고 자금 수요는 넘치던 당시엔 은행 대출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특혜였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관치금융’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졌다. 정권의 대리인으로서의 은행 역할은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은행들은 정부가 결정하는 대로 대출을 해주거나 자금을 회수하면 뒤탈이 없었다.
외환위기 때부터 22년간 재정경제원 등 정부 부처와 한국은행, 시중은행 등을 취재해온 필자가 보기에 정도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지금까지도 한국 금융의 예속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자금과 인사는 여전히 정권의 영향력 아래 있다. 정치적 계산에 따라 어떤 회사(대우조선해양)는 분식회계 의혹에도 은행들을 앞세워 7조 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해주고, 어떤 회사(한진해운)는 법정관리로 내몬다. 금융지주 회장들은 만신창이가 되도록 투쟁을 벌여야 간신히 연임할 수 있다. 감사, 사외이사 등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엔 대선 캠프 출신 낙하산들이 줄지어 내려온다.
관치의 족쇄에 묶인 사이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갈수록 퇴보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2년 5.50%에서 4.96%로 떨어졌고, 금융업 일자리는 작년 말 79만1000개로 4년 사이 8만4000개가 사라졌다. 전통 금융 강국인 영국의 경우 금융산업의 GDP 비중이 12%에 이르고 종사자가 130만 명에 이른다.
본보가 현재 연재 중인 ‘강한 금융이 강한 경제를 만든다’ 시리즈 취재를 위해 본보 기자들과 특파원들이 주요국들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결과 금융과 정보기술(IT)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신금융 혁명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도 금융을 산업으로 키워야 할 때가 됐다. 금융산업 육성은 경제를 키우고 일자리를 만들고 국부를 창출하는 길이다.
정부는 채용비리와 같은 금융산업 스스로 신뢰를 갉아먹는 행위, 돈 되는 특정 분야에만 대출이 몰리는 쏠림 현상 등을 막을 수 있도록 금융감독을 철저히 수행해야 하겠지만 금융회사를 서비스 기관 취급하며 지나치게 공공성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의 말을 그대로 전한다. “우리 몸이 아무리 커져도 심장과 혈맥이 강하지 않으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이제 경제의 심혈기관인 금융산업에서 경제성장의 모멘텀을 찾아야 합니다.”
신치영 경제부장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