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민 케이웨더 공기지능센터장
지구온난화 대책은 시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속성이 있다. 이산화탄소를 줄이도록 하는 동기 부여가 쉽지 않다. 온실효과를 가져다주는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에 배출되면 전 지구로 확산돼 오랫동안 축적되면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분리된다. 가해자의 책임의식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언제, 어디서, 어떤 기상이변이나 온난화를 초래할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에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기후변화가 몰고 오는 위험은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맞서 싸울 분명한 적군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했고, 노르웨이의 경제학자 페르 에스펜 스톡네스는 기후변화에 대한 종말론적 접근법은 끊임없는 잔소리에 불과해 “과학커뮤니케이션 역사상 최대의 실패 사례”라 지적했다. 결국 “이산화탄소 배출이 왜 문제가 되는 행동인지에 관한 끊임없는 지적 훈련이 필요하다”(데일 제이미슨 미국 뉴욕대 교수)는 원론적 결론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미세먼지와 지구온난화는 화석원료 사용이라는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 다른 양상의 결과이므로 그 해결책은 같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진보와 보수로 갈렸던 논쟁은 하나의 해결책으로 귀결된다. 분명한 가해자와 막연한 피해자에서 그 피해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기후변화 문제는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가 대응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문제로 돌려준다. 이러한 덕목에도 불구하고 미세먼지의 공포에 고마워해야 하는 역설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다.
차상민 케이웨더 공기지능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