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주당 90시간을 넘어 ‘주당 100시간’ 근로가 화제로 떠올랐다. 전기차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선도기업으로 통하는 테슬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테슬라는 첫 대중형 전기차인 ‘모델 3’이 생산차질을 빚으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다. 창업주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테슬라의 모든 직원은 9월부터 주당 100시간씩 일한 끝에 겨우 내부 생산 목표를 맞추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본격 시행되는 내년부터 한국에서는 매킨토시의 성공담이나 테슬라의 위기탈출 스토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질 것 같다. 탄력근로 확대를 위한 연내 입법이 청와대의 노동계 눈치 보기 때문에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현행법의 테두리에서 탄력근로를 하기 위해서는 2주 안에서(노사 합의가 있을 때는 3개월) 주당 평균 52시간을 맞춰야 한다. 일감이 없을 때 덜 일하고 일감이 많을 때 더 일하는 작업방식이 2주∼3개월 단위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모텐 한센 교수(경영학)가 5000명을 대상으로 5년간 자료를 수집해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생산적인 근로가 가능한 최적의 시간은 주당 50∼55시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 52시간 근로는 장시간 근로와 낮은 생산성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기업문화를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만 생산성의 문제는 생사(生死)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일이다.
4차 산업혁명과 IT 분야에서 한국의 강력한 경쟁자인 중국의 기술기업들 사이에서는 ‘996’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인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일한다는 뜻이다. 엔지니어들의 세계에서는 오전 10시쯤 출근해서 한밤중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이라고 한다. 밤낮을 잊고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일하는 미국이나 중국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기회가 오거나 위기가 닥쳤을 때 더 평소보다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는 것이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매킨토시의 본체를 설계한 엔지니어 버렐 스미스는 매킨토시의 성공으로 두둑한 보너스를 챙기자마자 애플을 사직했다. 사직 후 그는 후드티에서 ‘9’자를 지워버리고 ‘0 HRS/WK…AND LOVING IT!(0시간 일하니 좋아요)’라는 문구만 남긴 채 입고 다녔다고 한다.
진정한 혁신은, ‘0’을 꿈꾸면서 ‘90’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싹튼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