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방한림전’에서
방관주는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남성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부모 역시 그가 선택한 삶을 존중한다. 부모가 죽은 후 자아실현의 의지를 펼치는데, 다른 여성영웅소설과 달리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다. “나는 비록 여자이지만 남자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찌 여자가 남편 섬기는 도를 내가 행할 수 있겠는가!” 방관주는 이렇게 외치며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제하고 사회와 국가에서 최고의 인물로 인정받는다.
방관주 앞에 영혜빙이 등장한다. 영혜빙은 최고의 가문에서 7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부장적인 오빠들은 영혜빙의 활달함을 조롱했고 부모는 성격이 이상하다고 여겨 걱정했다. 영혜빙은 혼사가 오가는 방관주를 한 번 보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과 남자로 변장한 사정을 간파한다. 그리고 유교적 삶을 요구하는 남성 대신 남장 여성이라도 영웅을 만나 부부나 형제처럼 사는 게 소원이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가부장적인 남편보다는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知己)를 원했던 영혜빙은 남성의 통제를 받는 것도, 남성을 위해 화장하는 것도, 한 남성만을 섬기며 사는 것도 모두 거부했다.
영혜빙은 방관주의 남성 삶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줬으며, 원했던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만들어간다. 자식이 없어 의심받던 이들은 아이를 입양하고 가족을 완성한다. 방관주는 죽기 직전 황제에게 여성이지만 남성의 삶을 살았고 영혜빙과 가정을 꾸리게 된 과정을 설명한 뒤 용서를 구한다. 황제는 놀라면서도 업적과 희생정신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방관주는 39세의 나이로 죽고 영혜빙 역시 뒤따라 유명을 달리한다.
두 주인공은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보여줬다. 영혜빙은 남성에게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성혼을 선택했으나 ‘방한림전’의 서술자와 등장인물인 황제는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이자 기특한 일’이라며 위로한다.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주체적 여성의식을 반영해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동성혼을 완성했다.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