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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 대회서 쓴맛 봤지만 상금만큼 귀한 ‘사람’ 얻었다”

입력 | 2018-11-27 03:00:00

[나의 스타트업 창업기]<2> 창업경진대회에 도전하다
초기자금 마련 위해 참가한 대회 아홉 달 동안 탈락 반복하다가
서울대 팀과 협력해 공모 당선




2016년 9월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가 연 ‘트렌드 X AR·VR 위크(Week) 해커톤’ 행사에서 창업진흥원장상을 받은 뒤 기념 사진을 찍은 김재혁 씨. 상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레티널 제공

“아니, 됐고! 그래서 너희들이 세계 최초라고?”

정훈이(하정훈·28·‘레티널’ 최고기술책임자)의 열정적인 설명을 끊은 심사위원의 비웃음 섞인 지적이 정훈이 가슴팍으로 날아와 꽂혔다. 정훈이는 “우리가 최초”라고 당당히 말했다. ‘아, 겸손했어야 했는데….’ 두 번째 비웃음이 날아왔다. “구글도 못한 걸 너희가 했다고?” “네!”

처음 참가한 창업경진대회. 결과는 탈락. 어쩌면 당연했다. 시제품 렌즈를 만들 비용이 없어 정훈이는 문방구에서 거울과 알루미늄 봉, 공작용 아크릴 등 렌즈처럼 만들 수 있는 건 모조리 사왔다. 아이디어만 확실하면 심사위원들이 알아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하지만 순진한 생각이었다. ‘공작품’처럼 테이프로 돌돌 말은 몇백 원짜리 투명 아크릴 렌즈를 증강현실(AR) 디바이스의 핵심이 될 ‘초소형 렌즈’로 진지하게 봐줄 심사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회(11월 13일자 A26면 ‘나의 스타트업 창업기 <1>대학생, 창업 첫발 내딛다’편 참조)에서 언급한 나(김재혁·28·레티널 대표)와 정훈이는 수많은 경진대회에 도전해 아홉 달 동안 탈락만 반복했다. 그래도 그런 ‘흑역사’ 덕분에 값진 교훈을 얻었다. 기술만 있으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란 생각은 명백한 착각이었다. 내 기술을 인정해 달라고 심사위원에게 떼쓰는 게 아니라 설득해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우리는 시연 동영상을 만들었다. 어설프게 만든 아크릴 렌즈를 심사위원들에게 일일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시간도 단축됐다. 설명 방법을 바꾸자 심사위원들의 시큰둥했던 반응도 조금씩 달라졌다.

상금이 목적인 경진대회에선 탈락을 거듭했지만 예상치 못한 소득이 있었다. 참가를 거듭하며 ‘사람’이 쌓이기 시작했다. 해커톤(팀을 이뤄 마라톤 하듯 긴 시간 동안 시제품 단계의 결과물을 완성하는 대회)에서 밤샘을 하며 옆 팀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나 심사위원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2015년 5월 해커톤에 참가한 우리에게 주최 측은 “아이디어가 비슷하다”며 서울대 박사과정생 등으로 구성된 팀을 소개해줬다. 우리는 하드웨어(렌즈)를 만들고 있었고, 그들은 소프트웨어(자막이 나오는 안경)를 개발 중이었다. 우리는 팀을 이뤄 그해 10월 미래창조과학부의 연구과제 공모에 도전해 선정됐다. 대회 참가로 새로운 인연을 만난 셈이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우리 회사에 처음 투자한 벤처캐피털리스트 역시 어느 스타트업 오디션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대회 참가 때마다 힘든 건 ‘대학생들이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겠어’라는 심사위원들의 편견이었다. “이 기술 개발해 봐야 중국에서 한 달이면 똑같은 걸 만들 텐데” “삼성도 아닌 학생들이 특허 한 개 가졌다고 뭘 할 수 있겠어”…. 거의 모든 대회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미래부 공모에서도 우리는 서울대 박사과정팀을 앞세워 발표했다.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경진대회마저 ‘간판’을 중시하는 듯해 씁쓸했다. 요즘 공공기관이나 기업들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확대하고 있는데, 도전자들의 스펙보다 기술력을 먼저 봤으면 좋겠다.

우여곡절 끝에 공모에 당선돼 연구 과제비를 받았다. 상금 3700만 원 중 1000만 원을 들여 시제품을 만들었다. 창업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본격적으로 창업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더 이상 집이나 카페에서 창업 준비를 할 수 없었다. 우리에겐 일에 집중할 제대로 된 ‘공간’이 필요했다.
 
정리=권기범 기자 ka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