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르트헤이트 무너뜨린 남아공 신흥 권력층 ‘전리품’ 독점에 안팎의 장밋빛 기대는 환멸로 인권 평등 같은 거창한 大義 앞서 평범한 미덕의 공동체 구축해야
고미석 논설위원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세계는 이 나라의 장밋빛 전망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이 나라의 흑인들은 자신들이 지지했던 바로 그 흑인 지도자에게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지를 조금씩 거둬들이고 있다.’
최근 출간된 ‘평범한 미덕의 공동체’의 한 대목이다. 캐나다 출신 정치학자 마이클 이그나티에프가 쓴 이 책에 따르면 남아공의 위계적 지배체제와 배타적 권력구조는 새로운 위계와 배제의 장치로 대체되었을 따름이다. 입버릇처럼 민주, 자유를 외치면서도 이웃나라 짐바브웨의 무자비한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특이한 정권이기도 했다.
남아공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제공한다. ‘촛불’의 깃발 아래 모인 네트워크 중 민노총 등은 정부와 ‘지분 밀당’을 할 만큼 권력의 중추로 떠올랐다. 그 기세는 ‘촛불 아니라 횃불을 들겠다’고 위협할 지경이다. “시민사회 및 노동조합의 밀월 관계는 끝난 것으로 본다”는 말이 공정거래위원장에게서 나올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식의 막무가내를 상대할 때는 흔들림 없는 원칙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래전 신생 민주국가에서 계층, 인종 간 평등을 내세우며 대통령에 취임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긴 메시지는 마치 우리 사회에 던지는 발언처럼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키 큰 사람을 잘라 키 작은 사람에게 나눠줄 수는 없다. 힘센 사람의 힘을 빼앗아 약한 사람에게 나눠줄 수는 없다. 주인을 몰아내고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줄 수는 없다.’
난세에 지켜야 할 국가운영의 기본 원칙을 천명한 링컨은 그 국가의 구성원이 지켜야 할 덕목도 언급했다. ‘버는 것보다 많이 써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돈을 빌려 편안한 생활을 할 수는 없다. 독립심과 창의성을 상실한 인간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링컨은 노예해방과 국민통합을 실천한 수완 좋은 정치인인 동시에 사회개혁에서 실사구시 태도를 견지했던 냉철한 지도자였다. 같은 맥락에서 만델라 역시 현실주의자였나 보다. “정치에는 구원이 없으며 단지 권력투쟁만이 있다. 그리고 권력투쟁 속에서 안정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제와 의무라는 미덕에 보상을 해주는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맞다. 집단의 힘을 믿고 제몫 챙기는 데 급급한 세력보다 묵묵히 소소한 의무를 다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정당한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공동체 운영의 기본이고, 또 그 사회가 건강하게 오래 유지되게 하는 관건이리라. 줄곧 ‘촛불의 권리’를 내세운 세력은 먼저 ‘촛불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지 자문자답할 때다. 그 답은 촛불 이후 한국 사회에서 빈부격차가 줄어들고 대한민국은 더 나은 미래로 향해 가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면 쉽게 나올 터다. 국가에 외환위기 같은 경제적 부도가 있다면 정치의 부도도 있을 것이다. 개인에게 도덕의 부도가 있듯이.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