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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613개에 묶인 ‘골목대장’… 글로벌 자산운용사 꿈도 못꿔

입력 | 2018-12-10 03:00:00

[강한 금융 강한 경제 만든다]4부 금융이 커야 富도 자란다
<2>멀고 먼 ‘한국판 블랙록’




2016년 3월 정부는 국민의 재산 증식을 돕는 ‘만능통장’이라고 홍보하며 여러 금융상품을 한데 모아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선보였다. 하지만 5년간 계좌를 해지하지 않아야 고작 30만8000원의 절세 효과를 보는 데다 은퇴자나 주부는 가입 대상에서 배제되면서 초반 반짝하던 인기는 빠르게 식었다. 지난해 전체 ISA의 절반 이상이 잔액 1만 원 이하인 깡통계좌일 정도다. 정부가 뒤늦게 중도 인출을 허용하고 비과세 혜택을 일부 확대했지만 투자자 반응은 여전히 싸늘하다.

국민의 부(富)를 불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ISA 같은 ‘관제 금융상품’을 만들어내기보다는 ‘한국판 블랙록’이 탄생할 수 있는 금융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낡고 복잡한 규제와 투자자에게 불리한 세제 등에 발목이 잡혀 국민의 재산 증식에 앞장서야 할 국내 자산운용업계는 구멍가게 수준에 머물러 있다.

○ 은행, 보험보다 세세한 자본시장 규제

정부의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자본시장법과 하위 시행령, 시행규칙, 행정규칙에 따른 규제 수는 총 613개로 집계됐다. 은행법은 243개, 보험업법은 375개였다. 금융업 중에서도 가장 모험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할 자본시장을 가로막는 규제가 은행, 보험업보다 2배가량 많은 것이다. 정순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본시장법 자체가 워낙 방대한 데다 이를 우회할 규제샌드박스 도입도 늦어졌다”며 “금융투자회사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싶어도 어떤 식으로 규제를 받을지 몰라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A증권사는 2년 전 인공지능(AI) 기반의 자산관리 서비스인 ‘로보어드바이저’를 이용한 투자일임 서비스를 구상했다. 하지만 금융사가 알아서 포트폴리오를 굴려주는 투자일임은 반드시 고객과 대면하고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법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올해 6월이 돼서야 자기자본 40억 원 이상인 금융사가 1년 6개월 이상 운용성과를 공시한 로보어드바이저를 이용할 때만 비대면 투자일임이 가능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나열식으로 디테일하게 열거된 자본시장법을 ‘금지하는 것 말고는 다 해도 된다’는 원칙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며 “그래야 금융사들이 창의성을 발휘하고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투자 꺼리게 만드는 세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달 ‘자본시장 혁신과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자본시장 혁신을 통해 부동산에 몰린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투자를 발목 잡는 세제를 함께 손보지 않으면 자본시장이 국민의 재산을 불릴 터전이 되기 힘들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60대 김모 씨는 올 들어 국내 주식형펀드에 투자했다가 1000만 원의 손실을 봤다. 하지만 현행세법은 펀드에서 손실이 났어도 이자나 배당이 발생하면 소득세(15.4%)를 매기도록 규정하고 있어 김 씨는 원금을 날리고도 세금을 내야 한다. 해외 펀드는 더 불리하다. 국내 펀드에 편입된 주식, 채권에서 양도 차익이 발생하면 비과세되지만 해외 펀드는 15.4% 세율로 세금을 매긴다. 여기에다 환차익, 이자, 배당 수익도 모두 과세 대상이다.

주식을 팔 때 손익과 관계없이 무조건 매도대금의 0.3%를 떼어가는 증권거래세나 큰손들이 장기 투자를 꺼리게 만드는 배당소득세에 대한 개편 요구도 계속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소액 투자자부터 큰손 투자자까지 세제에 불만이 크다. 자본시장으로 자금 유입이 되려면 ‘당근’이 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글로벌 운용사 키워야

영국의 자본시장 분석매체 IPE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100대 자산운용사’에 이름을 올린 국내 운용사는 한 곳도 없었다. 세계 1위인 블랙록이 6조 달러가 넘는 자산을 굴리는 것과 달리 국내 1위인 삼성자산운용의 운용자산은 30분의 1인 1945억 달러에 그친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운용 역량이 떨어지는 데다 과도한 투자자 보호조항이나 규제까지 겹쳐 국내 운용사들은 비슷한 상품만 만들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운용업계 성장이 정체됐다”고 말했다. 그나마 자본시장 규제 완화도 덩치가 큰 증권사 위주로 이뤄져 운용사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높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펀드 운용과 관련해 시시콜콜한 공시 의무사항이 많고 이게 다 비용이 돼 투자자 부담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은 “운용사들이 모험적인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주면 수익률도 높아지고 국내 운용업도 글로벌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건혁 gun@donga.com·조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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