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앞날 ‘시계 제로’
ECJ 판결로 ‘찬반 재투표’ 탄력… 메이, 부결 가능성 크자 전격 연기
2차 국민투표 놓고 여론전 치열… 전직 총리 3명도 재투표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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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영국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합의안에 대한 하원 인준 투표를 이틀 앞둔 9일 영국 런던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합의안이 부결돼 브렉시트가 번복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이들은 ‘(테리사) 메이 총리가 영국을 배반하지 못하게 하라’는 피켓까지 들고 거리에 나섰다. 런던=AP 뉴시스
EU 최고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ECJ)가 10일 영국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고 판결하면서 브렉시트의 미래가 ‘시계 제로’ 상태로 빠져들었다. 브렉시트 합의안에 대한 영국 의회의 비준 동의 투표를 하루 앞두고 브렉시트 찬성 진영에 불리한 내용의 판결이 나오자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투표 자체를 연기하기로 했다고 BBC가 보도했다.
지금까지 영국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지난달 25일 EU 27개국 정상과 도출한 브렉시트 합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내년 3월 29일 질서 있게 EU를 탈퇴하거나, 합의안을 부결시켜 아무 합의안이 없는 ‘노 딜’ 상태로 EU를 탈퇴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게 통상적인 해석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브렉시트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는 ECJ 판결이 내려지면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한 번 더 실시해 국민의 뜻을 다시 확인하자는 주장이 탄력을 받게 됐다. BBC는 “영국이 자체 판단에 따라 EU에 머무를 수 있다는 판결은 일부 의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현실적이고 성공 가능한 옵션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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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드 자비드 내무장관을 비롯한 여러 관료들이 “패배가 확실시된다”며 연기를 요구했지만 메이 총리는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표결을 강행하려 했다. 그러나 ECJ 판결 이후 더욱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메이 총리는 주요 각료들을 대상으로 콘퍼런스콜(전화 회의)을 소집했다. 이후 BBC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영국 언론은 내각 소식통을 인용해 투표 연기 소식을 전했다.
ECJ가 길을 터주면서 영국 내 국민투표 시행 여부를 두고 치열한 여론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생존 중인 4명의 전직 총리 중 존 메이어,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등 3명의 총리는 두 번째 국민투표만이 위기를 해결할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메이 총리는 “두 번째 국민투표는 없다”며 불가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 왔다. 데이비드 고크 법무장관도 “2차 국민투표는 오히려 국가 분열과 불확실성만 키울 뿐”이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BBC 등 영국 언론들에 따르면 메이 총리가 브렉시트 합의안 투표를 강행했다가 인준이 부결될 경우 △노 딜 브렉시트 △합의안 의회 재표결 △EU와 재협상 △조기 총선 △브렉시트 찬반을 묻는 두 번째 국민투표 △총리 불신임안 표결 등 6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메이 총리의 거취가 당장 문제다. 메이 총리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보수당 내 브렉시트 강경파들이 총리 불신임안을 추진하거나 야당인 노동당이 총리 불신임안이나 조기 총선을 밀어붙여 정권 교체를 노릴 가능성이 높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