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평전/박현모 지음/356쪽·2만3000원·민음사
창덕궁 후원에 있는 규장각(奎章閣)은 수원 화성과 함께 정조의 정치와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1776년 즉위하자마자 창설한 규장각은 일종의 왕실도서관으로 출발했지만,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고 인재를 키우는 산실로 자리 잡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규장각도’(오른쪽 사진) 역시 정조가 사랑했던 인재인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민음사 제공
솔직히 살짝 심드렁한 기분으로 펼친 책인 걸 부정하기 힘들다. 평전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한 세종과 함께, 대왕으로 숭상하는 임금이 아닌가. 교과서와 영화 등에서 숱하게 등장해 생소함이 1도 없는데. 심지어 드라마 덕분에 ‘이산’이란 이름까지 낯이 익으니.
실제로도 ‘정조 평전’이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밝혀내는 책은 아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한 짙은 그림자나 규장각과 탕평책, 수원 화성 축조 등의 공적도 웬만큼은 다 안다. 하지만 막상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누군가를 ‘안다’고 말한다는 게 얼마나 섣부른 일인지 깨닫는다. 그 대상이 위인일 경우엔 특히나 그렇다는 걸 책은 잘금잘금 짚어 준다.
예를 들어, 정조는 “국왕과 백성의 관계를 달과 시냇물로, 왕과 신하의 관계를 달빛과 구름에 비유하곤” 했다고 한다. 푸른 달빛이 냇물에 직접 비쳐야지 구름에 가리면 안 된다는 뜻이다. 즉, 지배자는 임금 한 사람이며, 나머지는 모두 민(民)인 셈이다. 이는 당파와 신분을 뛰어넘어 인재를 등용하고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지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 확립에 치중한 결과, 소모적 당쟁은 줄였을지 몰라도 공론을 형성해 생산적인 견제가 가능한 구조가 무너졌다. 이는 결국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똬리를 트는 데 기여하고 만다.
정조의 대표적 공적으로 꼽히는 규장각을 통한 지식 경영 또한 마찬가지다. 일종의 ‘싱크 탱크’였던 이 기구를 바탕으로, 국내외 지식과 정보를 모으고 젊은 인재를 키워낸 건 당연히 칭송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너무 ‘교육’에 방점을 찍다 보니 소통이 원활한 군신 관계이기보단 가르치고 혼내는 사제 관계로 기울었던 점, 정통 문예에 초점을 맞춰 소설의 유행과 같은 새로운 흐름엔 보수적이었던 점 등은 약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몇몇 아쉬운 대목을 들춰내더라도, 정조대왕의 위대함은 여전히 오롯하다. 정조는 자주 신하들에게 “물결이 아니라 나루가 있는 곳을 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후대에 와서 이렇다 저렇다 첨언을 하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통찰’은 누구보다 깊고 넓었다.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은 교만 때문이고, 스스로에게 관대한 것은 나약한 까닭이다”(홍재전서)라며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하면서도 백성과 나라를 위해 매진한 그의 생애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저자는 특히나 지금 시대라면 ‘정조’를 다시 읽을 것을 주문한다. 사마천의 말마따나 “난세를 다스려 올바른 세상을 되돌리는 해법”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백척간두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평생을 고군분투했던 군왕의 삶은 일깨우는 바가 크다. 다만 이 책이 다소 애매모호한 경계에 있단 점은 덧붙인다. 해박한 이에겐 놀랍지 않고, 낯선 이에겐 녹록지 않다. 타깃 층을 확실히 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