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축구대표팀 박항서 감독. 스포츠동아DB
지난해 9월말 베트남축구협회는 박항서(59)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영입하면서 가장 먼저 ‘풍부한 경험’을 앞세웠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강조했다. 또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면서 축구철학을 공유했다는 점도 부각했다.
하지만 국내 지도자의 베트남 진출은 큰 뉴스가 되지 못했다. 현지 반응도 냉랭했다. 유럽축구에 익숙한 베트남 축구팬들은 한국 출신 감독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외국인 감독의 무덤으로 불리는 베트남에서 아시아권 출신 감독이 버텨내기는 벅찰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박 감독은 이런 우려를 모두 불식시켰다. 베트남축구협회가 강조했듯이, 풍부한 경험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고 있다. 큰 대회를 치르고, 엄청난 성과를 거둔 박 감독의 경험은 베트남축구의 르네상스를 열어젖힌 원동력이 됐다. 히딩크가 한국에서 영웅이 됐듯이, 박 감독은 베트남의 영웅이 됐다.
하지만 선수로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대한축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국가대표팀에는 총 2번 소집됐고, A매치 출전은 단 한번이다.
선수시절 박항서 감독.
제일은행~육군축구단~럭키금성을 거치며 1988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1996년까지 LG(전 럭키금성)에서 코치로 일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는 김호 감독의 국가대표팀에서 트레이너로 경험했고, 1997년 수원 삼성으로 옮겨 코치생활을 했다.
박 감독의 이름 석자가 널리 알려진 때는 2002년이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서 감독과 선수들의 가교 역할을 맡아 4강 신화에 큰 힘을 보탰다.
2002년 8월 부산아시안게임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면서 처음으로 감독 타이틀을 달았지만 홈그라운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동메달에 그치며 경질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에는 K리그의 포항, 경남, 전남, 상주 등에서 지도자의 길을 걸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국내에서의 마지막은 실업팀 창원시청 감독이다.
그는 지도자로서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베트남으로 떠났다. 그는 “내가 가진 축구 인생의 모든 지식과 철학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붓겠다”고 다짐했다.
첫 번째 성과물은 올해 1월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이다. 조직력과 기동력을 앞세운 베트남은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이때부터 박항서 매직은 시작됐다.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는 4강에 올랐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에서는 10년 만에 정상에 오르며 2018년의 대미를 장식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베트남의 국민영웅으로 떠올랐지만 박 감독은 우쭐대는 법이 없다. 줄곧 겸손했다. 그런 언행이 베트남 팬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AFC U-23챔피언십이 끝나 뒤에는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뤄낸 성과가 아니다”며 주위의 도움에 더 감사를 표했다. 아시안게임 이후에는 “내가 베트남에서 낸 작은 성적으로 히딩크 감독님과 비교하는데 부담스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스즈키컵에서 우승한 이후에도 모든 공을 선수와 열성적으로 응원한 베트남 국민들에게 돌렸다.
지도자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박 감독의 신화는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