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바로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북중 접경지역의 여느 아버지처럼 장씨의 아버지도 밀수를 해 가족을 먹여 살렸다. 덕분에 북한에서도 먹을 게 없어 고생해본 적은 없었다. 혜산시에는 전에 비해 시장도 많이 들어섰다.
하지만 먼저 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고모 때문에 장씨 가족은 온 동네 주민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그런 삶에 점점 지쳐갔다.
“동네에서 저 집 가족 누군가가 탈북을 했다는 걸 다 알아요. 그리고 그 탈북한 가족이 중국으로 건너갔는지, 남한으로 건너갔는지도 중요하죠. 남한으로 건너간 경우 동네에서 감시를 해요. 특히 인민반장이나 보위부원 같은 경우에는 뭐라도 저희한테서 얻어가려고 자꾸 드나들거든요. 탈북가정이어도 생활 형편이 어려우면 관심 없어요. 그런데 저희처럼 뭔가 빨아먹을 게 있어 보인다 싶으면 더 세게 감시를 하는 편이에요,”
한국의 고모는 장 씨 마음에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지폈다. 부산에 정착한 고모가 전화통화에서 “한국에선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한 말에 솔깃했다.
“밀수 일을 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어요. 제대로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고모랑 북한에서 통화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 때 한국에선 하고 싶은 만큼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드라마를 통해 봤던 한국의 모습도 장 씨의 탈북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90도 경사진 산을 넘어 남한으로
중국에서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들어가 난민 지위를 얻었다는 장 씨는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짓“이라며 탈북 과정을 떠올릴 땐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 씨는 그 과정에서 국제관계와 외교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한국이 북한에 비해 중국, 라오스 등 탈북 루트가 되고 있는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가 잘 잡혀있지 않다보니 탈북 과정에서 늘 잡혀 북송될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태국에서는 무작정 경찰을 찾아가 ”저희 좀 잡아주세요. 난민 수용소로 좀 보내주세요“하고 사정하는 방식밖엔 없는 게 현실이었다.
인생을 바꾼 계기, ‘장대현 학교’
장은숙 씨는 남한으로 들어와 고모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남한 나이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장 씨는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밟아야 했다. 우연히 장 씨가 학교에 입학할 시기인 2014년 부산에 처음 문을 연 대안학교인 ‘장대현 학교’를 알게 됐고, 일반학교로의 진학 대신, 이곳에 ‘1기’로 입학했다.
”장대현 학교는 교회가 세워졌던 평양 중심의 ‘장대현’ 지역 이름을 딴, 탈북민을 위한 대안학교에요. 영호남 지역에는 탈북민 대안학교가 이 곳 하나뿐이더라고요. 운 좋게 1기로 입학할 수 있었죠. 특히 이 학교는 탈북학생만 있는 게 아니라, 통일을 준비하고 싶어하는 남한 학생들도 같이 공부할 수 있어요.“
장 씨는 이 곳에서 친구들과 3년 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함께 먹고 자며 끈끈한 우정을 다졌다. 남한 친구 역시 통일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했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했고 금방 어울려 생활할 수 있었다. 특히 남한 친구는 탈북 친구들에게 생소한 용어와 문화를 전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친구들이랑 다같이 놀러 다니면서 처음 듣는 외래어, 처음 보는 브랜드들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어요. 어느 날 친구가 서면에 가서 ‘서가*쿡 먹자’고 하는데, 그게 뭔지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몰랐겠죠. 저 역시 자연스럽게 ‘북한에서는 이런 걸 먹었어’, ‘북한에서는 이랬는데~’ 하면서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고요. 자연스럽게 전 남한을, 남한 친구는 북한을 알게 되는 계기가 계속 생긴 거예요.“
다양한 자원봉사자들과의 접촉도 이 학교에서 장 씨가 얻은 큰 소득이었다. 변호사나 의사 같은 다양한 직종의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찾아와 남한의 다양한 삶과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각종 통일 단체나 일반 학교 학생들과 공동 포럼을 진행하기도 했다. 앞으로 장 씨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정하는 자양분이 되었고, 그런 대화를 통해 스스로 ‘롤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
”입시반에 있을 때, 대학교 청강을 할 기회가 생겼었어요. 전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수업을 청강했었는데 1년 간 대학생들과 똑같이 수업을 듣고 시험도 봐요. 또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도 할 수 있었어요. 현실 세계 속 법조인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죠. 그렇게 남한에서 법조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장 씨는 남한에서 처음으로 종교를 접했다. ‘장대현 학교’가 기독교 대안학교여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됐고, 삶의 태도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됐다.
”제 고향은 양강도 혜산입니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가족과 공동체 울타리 안에서 자란 장은숙 씨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면서 자취방을 얻어 ‘나홀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힘들었다. 특히 학교 수업을 따라가며 벽에 자주 부딪혀야 했다.
”대학에 와서 과제를 받을 때마다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용어들이 많았거든요. 그래도 ‘장대현 학교’에서 신문 요약을 꾸준히 하고 글쓰기도 많이 해봤던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코스피, 코스닥 같은 경제 용어들은 특히 저한텐 완전히 새롭고 혼란스러운 개념이었거든요.“
하지만 워낙 밝고 긍정적인 성격에 금방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학교생활에 적응해갔다. 본인이 먼저 북한에서 왔다고 하지 않으면, 누구도 장 씨가 탈북민인 걸 알지 못했다. 종종 북한에서 왔다는 데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장 씨의 고향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친구들과 어우러졌다.
남한에 와서 가장 그리운 건 북한에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었다. 북한 체제가 싫어 고향을 떠났을 뿐, 남겨진 친구와 가족은 늘 그리웠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앞집 친구도 늘 생각났다. 통일이 되어 만나면 어떻게 변해있을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전 남북 관계를 얘기할 때, 왜 늘 핵과 정전협정만 얘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잖아요. 국가도 사람이 있어야 운영되는 거고요. 그래서 전 사람의 기본권, 즉 인권이 제일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체 남북 정상회담 후 발표된 선언문에 왜 인권은 한 글자도 없는 거죠? 대체 누굴 위한 선언인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속상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일단은 남북관계가 잘 진행됐으면 좋겠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인권도 언급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최근 남북 관계가 진전되며 장 씨는 평양의 모습을 여러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한다. 북한에서 온 장 씨에게도 평양의 모습은 새롭고, 신기했다.
탈북 청년이 통일에 기여해야
장 씨는 북한의 여러 지방에서 와 있는 탈북민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학교나 지자체에 찾아가서 강연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 과정이 결국 통일 후 남북이 하나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장 씨는 탈북민끼리의 연대가 잘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북한에서 온 친구들끼리 뭉치면 남한에 적응을 잘 못한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 안타깝다.
강은아 채널A 국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