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정치부장
계속 말을 하는데 밥은 기자보다 빨리 먹었다. 대개 숟가락질할 시간이 없어 남기거나 이야기를 마친 뒤 식사하기 마련인데 그는 달랐다. 하긴 술자리에선 막걸리 몇 통을 순식간에 비우는 것도 봤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얘기다. 그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하며 단식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고 했었다. 알아주는 대식가인 손 대표가 곡기를 끊을 정도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손 대표가 열흘 만인 15일 단식을 풀 수 있었던 건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가 컸다. 14일 문희상 국회의장을 만나 국회의 선거제 논의를 존중하겠다고 했고, 이걸 전달받은 손 대표도 선거제 개편의 모멘텀이 생겼다며 단식 중단의 명분을 찾은 것이다. 아무리 요새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해도, 대통령이 나서야 정치적 실타래가 풀린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혼밥, 혼술 자체가 문제 될 건 없다. 중요한 건 왜 이런 말이 계속 나오느냐일 것이다. 아마 손 대표처럼 대통령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회는 별로 없다는 방증 아닐까 싶다. 야권, 그중에서도 자유한국당 인사들이 문 대통령과 비공식적으로 저녁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다. 하긴 문 대통령도 사람인데 맨날 싫은 소리만 하고 지지층 중 일부는 자신의 탄핵까지 거론하는 정파 인사들을 굳이 만나야 하나 싶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전직 대통령도 비슷했다. 주로 관저에서 지냈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차치하더라도, 이명박 전 대통령도 주변에 “야당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야당 협조 없이는 법안 하나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운 게 현재 정치 지형. 이 구도는 2020년 총선 전까지는 바뀌지 않는다. 때문에 최소한 그때까지는 대통령이 야당을 설득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당직 맡으면 정무수석에게 난 들려 보내는 ‘영혼 없는’ 소통이나 얼굴 잊을 때쯤 모이는 여야정 협의체 말고, 대통령이 불쑥 저녁 번개를 제안하는 식의 ‘정치적 소통’ 말이다.
처음엔 쉽지 않을 것이다. 같은 법조인 출신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야당 인사들을 자주 만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중엔 먼저 연락했다. 2014년 11월 중간선거 패배 후 기자들이 오바마에게 정국 수습책을 묻자 “(야당인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에게 버번위스키 한잔하자고 해야죠”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썩 내키지 않아 했던 그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버번위스키로 유명한 켄터키주가 지역구였던 매코널은 영화 ‘스타워즈’의 악역 ‘다스베이더’가 별명일 정도로 워싱턴 바닥에서도 유명한 냉혈한. 하지만 둘은 나중에 백악관에서 그 위스키를 마셨고 종종 샌드위치 점심을 했다. 설득이 통했는지, 오바마 임기 중 공화당은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를 폐기하지 못했다.
아무리 정치가 팍팍해졌다 해도 대통령이 양주도 아닌 막걸리에 저녁 하자는 데 마다할 사람은 별로 없다. 식사 한 끼 했다고 모든 일이 풀리지는 않겠지만, 이런 소통 노력 없이 큰일하기도 역시 쉽지 않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