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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하고 베푸는 박 감독 리더십, 어머니가 물려줘”

입력 | 2018-12-22 03:00:00

베트남-한국 휘몰이 ‘박항서 열풍’… 고향 산청군 가보니




[1] 박항서 감독의 모친 박순정 여사가 치매 증세로 입원해 치료받고 있는 경남 산청군의 한 요양병원에서 박 감독의 현역 시절 사진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2] 스즈키컵 결승 1차전을 앞두고 7일 말레이시아로 가는 비행기에서 박 감독이 선수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 감독은 비즈니스석을 부상한 선수에게 양보하고 이코노미석에 앉았다. [3] 경남 산청군의 박 감독 생가. 산청=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페이스북 캡처

“항서는 절대로 물에 가지 마라. 물에 가면 안 된데이.”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이끌며 영웅이 된 박항서 감독(59)의 모친 박순정 여사(96)에게는 내년 환갑이 되는 막내아들 항서에게 아직도 이런 걱정의 말을 한다. 박 감독이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고향인 경남 산청군 생초면에는 강정이라는 곳이 있다. 남강의 본류인 경호강과 엄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박 감독의 고향 선배 배성한 씨는 “강정에는 어린 시절 박 감독을 비롯해 동네 선후배들이 많이 어울렸던 백사장이 있는데 가끔 익사 사고가 난다. 박 감독 모친께서는 강정 백사장에서 뛰놀던 아들 걱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박 여사는 다리가 불편하고 치매 증상이 있어 산청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직후인 9월, 기자는 박 감독 고향 지인들의 도움으로 요양병원에서 박 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박 여사는 기자를 보자마자 “항서 동생이가?”라며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박 여사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준비해간 박 감독의 현역 시절 사진을 넣은 액자를 건네자 박 여사는 “항서 맞네. 잘 돌봐주지도 못한 우리 막내다”라며 사진 속 박 감독의 얼굴을 연신 손으로 쓰다듬었다.

박 여사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축구 4강전 베트남과 한국전(한국 3-1승)을 요양병원에서 지켜봤다. 전담 요양사는 “박 감독이 화면에 비칠 때마다 박수를 치고 기뻐하셨다”고 했다. 박 여사는 짧은 면회시간이 끝나기 직전 기자의 손을 꼭 잡고 “항서가 내 아들이지만 그래도 한국이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했다. 박 여사는 아들이 베트남 우승을 이끈 스즈키컵도 지켜봤다.

박 감독의 고향 지인들은 박 감독이 모친의 기질을 꼭 닮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고향 친구 박재식 씨는 “박 감독의 어머니가 지금으로 얘기하면 ‘여걸’ ‘여장부’다. 경남 사천시 축동면 출신이라 ‘축동댁’으로 불리셨는데 억척스럽고 당차면서도 정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그 옛날에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나오셔서 자식 교육열도 대단했던 분”이라며 “주위에 늘 사람이 많고 리더십도 있는 박 감독은 어머니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 내려놓고 지금도 내려놓는 축구 인생

박 감독은 부모가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약사는 아님)해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다. 생초초등학교에서 축구를 하면서 공부를 병행했던 박 감독은 서울 경신고에 진학해 당시 이경이 축구부 코치를 찾아가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인생을 시작한다.

남들보다 늦게 뛰어든 엘리트 축구 선수의 길. 불도저 같은 투지와 왕성한 활동량이 돋보이는 미드필더(링커)로 청소년 대표를 거쳐 한양대와 실업 제일은행, 프로 럭키금성(FC서울의 전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조광래, 박창선 등 당대 같은 포지션 스타들과의 경쟁에서 이름값에 밀려 1980년대 국가대표 1진(화랑) 진입의 문턱을 넘어보지 못했다. 경쟁 선수들은 장점이 부각됐지만 박 감독은 이상하리만큼 작은 키와 몸집의 핸디캡이 장점을 가렸다. 국가대표로 뛴 A매치는 단 1경기. 1981년 3월 한일 정기전에서 전반 17분 교체 투입돼 73분간 뛴 게 전부다. 그가 지금도 가장 아쉬워하는 선수 시절 커리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는 29세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남들이 봤을 때는 급했다. 은퇴한 럭키금성에서 박 감독의 첫 직책은 트레이너. 박재식 씨는 “당시 왜 은퇴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진주 전지훈련장으로 가보니 박 감독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상황이 좋다고 하더라”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때 박 감독 이름 앞에 ‘영원한 트레이너’ ‘영원한 코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감독과 선수 사이 가교 역할을 하는 능력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는 표현이다. 국가대표 스타 출신이라는 꼬리표만 붙으면 현역 은퇴 후 곧바로 감독도 할 수 있는 시절, 박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프로와 국가대표팀을 오가며 13년간 화려한 조명과는 거리가 먼 트레이너와 코치로 살았다. 박재식 씨는 “한편으로는 ‘내공’이 쌓였겠지만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라고 했다.

연세대와 고려대 출신으로 대표되는 주류 학연과 지연에 속하지 않는 박 감독에게는 유난히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많았다. 1994년 트레이너로 참가한 미국 월드컵이 끝난 뒤 대표팀 감독이 바뀌고 코치로 임명됐으나 6일 만에 팀을 나와야 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 신화를 이룰 때 거스 히딩크 감독 밑에서 코치를 맡았으나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욱이 그해 부산 아시아경기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동메달에 그치자 3개월 만에 경질됐다.

박 감독의 지인들은 ‘인간 박항서’의 축구 인생을 ‘내려놓는 역사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처음으로 맡은 부산 아시아경기 축구대표팀 감독에서 경질된 뒤 이듬해에는 후배를 감독으로 모시고 다시 코치로 백의종군했다. 후배 밑에서 선배가 코치를 한다는 건 지금도 드물다. 배성한 씨는 “포항 최순호 감독이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서 코치 생활을 다시 하게 됐는데, 박 감독은 그때가 지도자 인생에서 가장 내공을 많이 쌓은 시간이었다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2005년 고향 팀인 경남FC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돼 돌풍을 일으키고도 2년 만에 ‘자의 반 타의 반’ 자리를 내려놓았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 박 감독의 축구 인생 스토리는 현재도 진행형이라고 지인들은 말한다. 박재식 씨는 “경남FC를 나오고 전남, 상무 감독을 거쳐 창원시청 감독도 했지만 박 감독은 정말 ‘끝나면 빈털터리’다. 그 정도 지도자 생활을 했으면 재산도 모았을 텐데 다 내주고 없다. 베트남도 국내에서 능력 있는 후배들의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된다고 해서 간 것”이라고 했다. 박 씨는 “베트남에서도 우승 포상금, 보너스 등을 전부 기부했는데 이런 삶이 박 감독의 운명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 베트남의 성지된 생초… 박항서 박물관 설립 구상

베트남 영웅이 된 박 감독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박 감독이 태어난 경남 산청군 생초면 생가가 이제 한국을 찾는 베트남 관광객의 단골 여행 코스가 됐다. 베트남 관광객들이 아예 서울에서 버스를 전세 내 찾는다. 베트남 현지 항공사와 여행사들의 산청군 답사가 이어지고 있다. 생가는 현재 박 감독의 셋째 형인 박삼서 씨가 살고 있다.

산청군은 박 감독의 생가와 모교인 생초초교, ‘생초 박항서 축구장’을 중심으로 박항서 박물관 건립 등 관광화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생초에 국내 최초로 ‘축구 행정학교’를 세우자는 논의도 있다. 배성한 씨는 “축구 선수도 육성하면서 축구 관련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행정 인력을 양성하는 학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재식 씨는 “박 감독은 아직 자신의 이름이 마케팅에 활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초축구장을 ‘박항서 축구장’이라고 이름을 붙일 때도 꺼렸다”고 전했다.

스즈키컵 우승의 감격도 잠시, 곧바로 아시안컵 대비에 들어간 박 감독에게 한 가지 마음 편치 않은 일이 생겼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가를 지켜 늘 마음의 빚이 있었던 형 삼서 씨가 최근 식도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박 감독으로서는 다시 한번 기적을 써야 할 동기가 생겼다고 지인들은 말한다.

산청=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