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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범석]회식 실종 시대… 바람 맞는 꼰대

입력 | 2018-12-24 03:00:00


김범석 도쿄 특파원

18일 오후 일본 도쿄 신바시(新橋)의 한 맥줏집. 20, 30대 영업사원 4명과 이들을 이끄는 30대 후반 팀장이 맥주잔을 부딪치며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요즘 야근이 많아서 힘드네요. 업무 능률도 떨어지는 것 같고요.”(사원1)

“몇 시까지 야근해?”(사원2)

“오후 9∼10시 정도요. 집에 가면 잠을 자기 바빠요.”(사원1)

이 말을 듣고 있던 팀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오후 9∼10시가 야근이라니…. 내가 젊었을 때는 그 정도는 야근이라고 생각도 안 했다고.”

팀장의 말이 끝나자 그의 뒤에 있던 선풍기에서 바람이 불었다. 이어 “성과를 내야지” “좀 더 힘내라고”라는 팀장의 ‘잔소리’가 계속되자 선풍기 바람은 약풍에서 강풍으로 바뀌었다.

팀장의 자리 뒤에 설치된 것은 ‘선배풍 1호’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지능(AI) 선풍기. 일본의 수제 맥주회사 ‘요호브루잉’이 개발한 제품이다. ‘선배풍(先輩風)’이라는 단어는 부담스러운 무용담이나 경험담 등을 일컫는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꼰대’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뜻이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후배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하면 자동으로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고, 발언의 양에 따라 약, 중, 강으로 바람의 강도가 올라간다. “(예전에) 대단했지” 같은 자기 과시 표현부터 “경험이 얕네”처럼 부하 직원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 등 선풍기가 인식하는 표현은 2000여 가지에 이른다. 선풍기 바람을 맞은 팀장에게 소감을 묻자 “평소 ‘선배풍 같다’고 느끼지 못했던 표현에도 바람이 불어 놀랐다”고 말했다. 부하 직원들은 “나는 ‘선배풍 바람’ 맞는 상사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업체 관계자는 “모두가 즐겁게 회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취지로 선풍기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오죽했으면 이런 기계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보수적으로 여겨지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일본의 조직 문화는 최근 과로로 인한 직원 자살, 상사가 부하를 괴롭히는 권력형 갑질인 ‘파워하라(Power Harassment)’ 등이 사회 문제화되면서 법 개정 등 국가 차원에서 ‘대수술’ 중이다. 이런 변화의 가장 큰 계기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거론된다. 거대한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먼 미래가 아닌 ‘지금’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커졌다는 얘기다.

취재차 만난 적이 있는 30대 귀농인 다카하시 아키히토 씨는 잘나가던 도쿄의 ‘여행 가이드’ 타이틀을 버리고 농촌으로 내려온 이유에 대해 “사회에서 치열하게 버티며 살아남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삶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근본적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회사 송년회 회식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일본의 한 제약회사가 20∼40대 직장인 500명을 대상으로 회사 송년회 참석 관련 설문조사를 했더니 44%가 ‘가기 싫다’고 답했다.

회사들도 고민을 시작했다. 최근 1인당 5000엔(약 5만 원)의 식사비용을 회사에서 부담하는 방식으로 ‘부서 친목회’를 열거나 ‘사내 바(BAR)’를 만들어 맥주나 칵테일 등을 자유롭게 마시도록 하는 등 수평적인 회식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정보기술(IT)이나 벤처 업체들이 새로운 회식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꼰대 상사에게 ‘바람 따귀’ 날리는 AI 선풍기가 사라지는 날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김범석 도쿄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