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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헤이세이, 그 이후의 일본

입력 | 2018-12-24 03:00:00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 일왕이 타계한 지 몇 시간 만에 당시 오부치 게이조 관방장관이 새 연호를 공개했다. 최종 후보였던 슈분(修文), 세이카(正化)를 제치고 정부가 낙점한 것은 ‘平成(헤이세이)’. 중국 고전에서 따온 글자로 나라 안팎의 평화, 천지의 평화가 이뤄진다는 의미다. 이튿날 아키히토 일왕의 즉위로 시작된 헤이세이 시대는 내년 4월 30일 그의 퇴위와 함께 막을 내린다.

▷헤이세이 시대 일본은 연호에 걸맞은 평화를 누렸다. 아키히토 일왕도 23일 자신의 85세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헤이세이가 전쟁이 없는 시대로 끝나게 된 것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감정에 복받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전후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전쟁에서의 많은 희생과 국민의 노력으로 구축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전후 태어난 세대에도 올바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의 상징적 존재인 아키히토 일왕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종전 60년 사이판, 종전 70년 팔라우 등 일본이 벌였던 무모한 전쟁의 치열한 격전지를 찾아가 전몰자들을 추모하고 과거사를 일깨웠다. 이런 일왕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과 존경심은 극진하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같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도 일왕 부부는 현장을 찾아 무릎을 꿇은 채 낮은 자세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해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1년 12월, 아키히토 일왕은 생일 기자회견에서 또 한번 의미 있는 발언을 던졌다. 1300년 전 간무 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었고 그래서 자신도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는 “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했던 시기에 한국 국민이 겪은 고통”을 언급하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재위 기간 중 몇 번 방한 의사를 피력했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의 참화를 되새기며 ‘전쟁 없는 시대’에 감사하는 일왕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의 개헌에 박차를 가하는 아베 정권. 아키히토의 여정이 끝난 뒤 ‘포스트 헤이세이’ 일본은 또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