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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하정민]영자의 전성시대

입력 | 2018-12-24 03:00:00


제작: 김희원 디지털뉴스팀 인턴

1991년 데뷔 직후부터 방송가를 휩쓸었지만 드센 뚱녀 캐릭터만 맡았다. 캐릭터를 위해 세련된 본명 ‘유미’ 대신 촌스러운 가명 ‘영자’를 썼다. 최고 유행어는 ‘살아, 살아, 내 살들아!’였지만 그 살에 관한 사건으로 인생의 밑바닥도 경험했다. 먹방으로 제2 전성기를 맞았고 KBS의 첫 여성 연예대상 수상자가 됐다.

방송인 이영자에 대한 시선 변화는 우리 사회가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첫 번째 전성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 사람들은 그의 몸과 식탐을 폄훼하고 비웃었다. 개그 소재였다지만 경멸과 모멸의 시선이 담겼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손조차 내밀지 않는 남성 연예인을 보며 “내 손이 돼지발처럼 보이나”라고 자조해야 했다.

사반세기가 지난 2018년 말 지금 그는 가장 핫한 스타일 아이콘이다. 수영복 차림을 당당히 공개해 찬사를 받았고 유명 패션잡지의 표지 모델로도 데뷔했다. 단순히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는 기준을 바꾼 정도가 아니다. 그는 비혼 중년 여성의 새로운 상을 제시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년 여자를 통칭하는 단어는 ‘아줌마’. 억척스럽고 타인에게 폐를 끼친다는 비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들은 결혼과 출산을 거쳤다. 가부장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큰 성공은 못했어도 최소 실패하지는 않은 인생이다.

문제는 이 아줌마에 속하지 않고 속할 일도 없는 사람이 늘어나는데도 사회는 늘 중년 여자를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로 정의한다는 거다. 이영자는 남편과 자식이 없고 세속적 기준에서 젊고 아름답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잘 일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절친 송은이와 김숙도 마찬가지. 이들은 “남편, 아이, 시부모 얘기를 할 수 없으니 방송가에서 우리를 찾지 않는다”며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자신의 노화나 폐경을 소재로 삼지만 신세한탄은 없다. 젊지는 않지만 노년에 대한 각오를 다지기에도 너무 이른 시기. 이들은 그 어중간한 나이에서 소수자로서 겪는 당혹감과 비애를 솔직담백하고 재치 있게 풀어놓는다.

비혼 중년 여성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일본에선 이들을 ‘마케이누(負け犬)’로 부른다. ‘싸움에 진 개’란 뜻으로 경주에 이긴 승자를 의미하는 ‘가치우마(勝ち馬)’의 반대말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해도 남편과 자식이 없는 여자는 실패자로 취급받는다는 뜻이다.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나고 이성에게 인기도 없지만 마음 편히 나이 드는 사람이고 싶다.” 비혼 중년 여성의 일상과 고뇌를 그린 글로 화제를 모은 일본 작가 사카이 준코의 베스트셀러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에 나오는 글이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최화정 이영자 송은이 김숙을 보며 이 ‘홀로 나이 들어감의 정수’를 배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고 재미있는 얘기를 하며 웃고 즐기는 삶. 결혼할 확률이 원자폭탄을 맞을 확률보다 낮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역시 독해. 저걸 누가 데리고 살아’란 말을 들어도 괜찮은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