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자택서 만난 ‘김시스터즈’ 맏언니 숙자 씨
미국에 처음 진출한 원조 한류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맏언니 김숙자 씨(79)가 인터뷰 도중 1960년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썼던 만돌린을 꺼내 즉석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악기에서 손을 뗀 지 꽤 됐다고 했지만 노래와 연주 실력은 여전히 수준급이었다. 헨더슨=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19, 20세 소녀 3명이 1959년 1월 어느 날 김포비행장에서 추위와 긴장에 몸을 떨며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들은 ‘동양에서 온 마녀’로 불리며 뛰어난 노래, 춤, 연주 실력으로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케이팝의 전설’이 됐다. 한국 최초로 미국 연예계에 진출해 빌보드 차트 7위까지 올랐던 3인조 걸그룹 ‘김시스터즈’ 이야기다.》
활동 당시 동아일보에 소개된 김시스터즈의 모습. 왼쪽부터 애자 민자 숙자 씨. 김시스터즈는 1959년 미국에 진출해 한국인 처음으로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동아일보DB
헨더슨=박용 특파원
미국 뉴욕의 제작사 ‘디모킴뮤지컬시어터팩토리’는 22일(현지 시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컴포트 우먼’ 감독인 김현준 연출자(27)와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루커스 포스터가 김시스터즈 스토리를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함께 제작한다”고 밝혔다. 김시스터즈 스토리는 미국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계획이다.
뮤지컬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김시스터즈의 맏언니 김숙자 씨(79)를 15일 네바다주 헨더슨 자택에서 단독으로 만났다.
―데뷔 60주년에 뮤지컬 제작이 추진된다.
김시스터즈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천재로 불리는 작곡가 김해송 씨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 씨의 두 딸 숙자와 애자 씨(작고), 조카 민자 씨(헝가리 거주)로 결성된 3인조 걸그룹이다.
1963년 에드 설리번 쇼 출연 당시 김시스터즈와 에드 설리번(왼쪽에서 두 번째), 숙자 씨 어머니인 가수 이난영 씨(가운데). 동아일보DB
―미국은 어떻게 진출했나.
“어머니가 1951년 김시스터즈를 만들어 미군 무대에서 함께 공연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미군들이 ‘김시스터즈 잘한다’고 소문을 냈다. 미국인 에이전트가 한국으로 와서 우리를 캐스팅했다. 캄캄한 밤을 걷는 심정으로 미국에 갔다. 4주 계약을 하고 잘되면 추가 공연을 하기로 하고 1959년 2월 3일 라스베이거스 스타더스트호텔에서 첫 공연을 했다. 그게 잘돼 8개월 반을 더 공연하고, 뉴욕의 유명한 TV쇼인 에드 설리번 쇼까지 출연했다.”
김시스터즈는 비틀스, 프랭크 시내트라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출연하던 에드 설리번 쇼에 25번 출연했다. 역대 최다 출연 기록이다. 그녀는 “쓰고 있는 회고록 제목을 ‘4주 그리고 옵션(4 Weeks and Option)’이라고 정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당시에 미국에 걸그룹이 많았는데….
“당시 앤드루스 시스터스 등 걸그룹이 많았다. 어머니는 미국에 갈 때 ‘노래만 갖고 성공할 수 없다. 다른 재주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가야금 북 장구 등 한국 악기부터 기타 색소폰까지 배우게 했다. 발레도 배웠다. 그걸 미국에서 다 썼다. 얼마나 똑똑하셨나. 엄마는 천재였다. 에드 설리번 쇼에 나갈 때마다 다른 악기를 들고 오라고 해서 백파이프까지 연주했다. 내가 악기 13개를 연주했다.”
“우리는 가사 리듬 박자까지 다 외웠다. 뜻도 모르고 영어 노래를 불렀다. 다 외우니 악보를 보지 않고 춤을 추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었다. 하루에 8시간씩 연습했다. 어머니가 미국으로 떠날 때 남자 친구가 생기면 그룹이 깨진다며 ‘23세 때까지 연애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4년간 지켰다. 미국 사람들은 굉장히 놀라더라. 4년 뒤 어머니가 미국에 와서 우리가 성공한 걸 보고 처음 데이트를 승낙했다.”
―어머니 이난영 씨가 큰 도움이 되셨던 것 같다.
“엄마가 1963년 미국에 오셔서 에드 설리번 쇼에 처음 같이 나갔다. 시간이 없어서 영어 가사를 외우지 못하신 어머니가 ‘너희들은 걱정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하셨다. 무대에 올라가서는 어머니 파트에서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님이 넘던 고개요’라며 우리말로 박자까지 맞춰 노래를 척척 불렀다. 미국 공연을 할 때 객석에 앉아 계시다가 우리가 ‘한국에서 온 어머니’라고 소개하면 무대에 올라오셨는데, 늘 기립박수가 나왔다.”
―당시 인기가 얼마나 있었나.
―그런 어머니가 1965년 돌아가셨을 때 왜 한국에 가지 않았나.
“비행기 표를 끊어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공연과 TV 출연 스케줄이 1년 치가 잡혀 있었다. 매니저가 ‘이대로 공연을 포기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무엇을 원했겠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라면 어땠을까. 아마 ‘쇼 머스트 고 온(Show must go on·공연은 계속돼야 한다), 킵 고잉(Keep going·계속해라)’이라고 하셨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다. 2006년 한국에 가서 어머니를 수목장으로 다시 모실 때 ‘엄마 다 이해하시죠?’ 하고 펑펑 울었다. 어머니는 ‘스테이지 어머니(무대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이해하셨을 것이다.”
―한복을 입고 한국어 가사를 넣은 이유는….
“우리는 한인이기 때문에 애국심이 있었다. 미국 공연기획자가 한복을 입으면 몸동작이 잘 보이지 않으니 중국옷을 입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공연을 시작할 때 늘 한복을 입고 아리랑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복을 벗고 중국옷을 입으면 미국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자는 어머니의 아이디어였다. 미국 사람은 한복을 기모노로 알았다. ‘우리가 성공해야 그게 한복이라는 걸 안다’고 동생들과 다짐했다. 애자가 ‘찰리 브라운’ 노래를 부를 때 ‘전부 다 왜 나를 못살게 구나’라는 우리말 가사를 넣은 적도 있다.”
숙자 씨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한인 여성들과 함께 한미여성회를 만들어 자원봉사와 기부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이 우리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케이팝이 미국에서 인기다.
“방탄소년단(BTS)을 잘 안다. 빌보드 순위에 오르고 상을 받는 걸 보면서 감개무량했다. 외모가 좋고 춤동작이 자연스럽다. 사운드도 굉장하다. 남편 친구의 딸이 BTS 때문에 한국어를 배운다고 하더라. 내게 BTS 사인까지 받아달라고 했다. 보이그룹이지만 ‘제2의 김시스터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기회가 되면 꼭 만나서 격려해 주고 싶다. 미국에서 공연을 더 많이 했으면 한다.”
그는 1968년 남편 존 보니파지오 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있다. 그는 6년 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숙자 씨는 “이제 하나님에게 간다고 했더니 남편이 따라오겠다고 하더라. 거긴 쫓아오지 말라고 했다”며 웃었다. 넉 달 전부터 회고록을 쓰기 위해 학교에 등록해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손자에게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려주고 싶어 피아노 레슨도 받고 있다.
헨더슨=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