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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걸크러시]〈15〉남자 옷을 입고 금강산을 오르다

입력 | 2018-12-25 03:00:00


“여자 가운데 어찌 우뚝한 존재가 없겠는가? 그런데도 여자는 세상과는 절연된 깊숙한 규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탓으로 스스로 그 총명함과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마침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 중에서



1817년 강원도 원주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가사나 바느질 대신 글공부를 했다. 경서와 사서의 대략을 통하고 옛 문장들을 본받아 시와 문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열네 살에 부모 허락을 받고 남장(男裝)을 한 채 여행을 떠난다.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의림지를 시작으로 단양을 거쳐 금강산 일대를 마음껏 누비고 관동팔경을 빠짐없이 유람한 후 설악산을 관통하였다. 한양을 섭렵한 후 그는 첫 여행을 멈췄다.

‘여자가 남자의 복색을 갖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그침이 옳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말한 후 그는 여성으로 돌아왔다. 몇 년 후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고, 29세가 되던 해 의주부윤의 벼슬을 받은 남편을 따라 평양을 유람하고 의주에서 2년을 지낸다. 31세가 되던 해 벼슬에서 물러난 김덕희와 함께 한양 용산 지역에 있던 삼호정(三湖亭)에 머물면서 여성 시회(詩會)를 조직하여 19세기 여성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다. 34세가 되던 1850년 봄날 자신이 여행했던 기록들을 모아 ‘호동서락기’를 완성하였다. 1851년에서 1856년 사이의 어느 날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19세기 조선 여성문학사의 중심에 우뚝 선 그녀가 바로 김금원(金錦園)이었다.

그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야만국이 아닌 조선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만 가난한 집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했다. 총명하고 넓은 식견을 가졌어도 여성에게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슬퍼하였다. 강한 여성의식은 동생인 경춘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금원의 눈에 비친 경춘은 외모와 문학적 자질이 뛰어나 고금(古今)에서 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금원은 ‘경춘이 규중의 여자였으므로 세상에 쓰이지 못했음’을 애석해했다.

의주 생활 2년간 보았던 풍경 중 가장 주목했던 것은 바로 남다른 기녀들의 모습이었다. 금원이 기록한 기녀들은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군복을 입고는 굳센 말에 올라타 대오를 갖추고, 호각과 북소리에 맞춰 마장 안으로 들어간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였다. 삼호정에서 지냈던 시간 역시 당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주체적이었다. 운초(雲楚)라 불렸던 김부용(金芙蓉), 경산(瓊山), 박죽서(朴竹西), 경춘 등과 함께 시회를 주도했다. 이 모임을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으로 칭하기도 한다. 특히 금원은 당대 최고의 문인인 홍한주(洪翰周), 신위(申緯), 서유영(徐有英) 등과 문학적 교류를 가졌다. 삼호정시단 활동은 동우회 수준을 넘어 여성문학사의 지평을 넓혔다.

금원은 기괴한 곳을 탐색하고 이름난 곳을 여행했던 사실에 대하여 ‘남자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평생지기였던 운초 역시 금원을 여자 중 영웅호걸이라 불렀고 남자가 되지 못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음을 슬퍼하였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