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형권 국제부장
기자도 북-미 비핵화 협상 관련 글을 쓸 땐 동병상련(同病相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상상력이 필요했다. 중재자를 자처한 한국 정부의 비장한 처지를 사춘기 딸과 아내의 갈등 사이에 낀 아빠 신세에 비유한 적이 있다.
“아내에게 ‘딸 좀 그만 몰아세워요’라고 하면 아내는 ‘아빠가 그러니까, 애 버릇이 저렇지’라고 내 탓을 한다. 딸에게 ‘엄마한테 작작 대들어라’고 하면 딸은 ‘엄마가 늘 먼저 나를 긁잖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역시 내 탓을 한다. 정말 미치겠다.”
가는 해를 정리하고 오는 해를 준비하는 연말. 살얼음 위를 걷듯 시작한 비핵화 협상 여정이 어디쯤 와있는지 궁금해진다.
“북한은 (단기간 안에)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0년 안에 불가능하다.” 국내 ‘꼴통’ 보수나, 워싱턴 대북 강경파의 평가가 아니다. 중국의 대표적 국제정치학자 옌쉐퉁(閻學通·66) 칭화(淸華)대 국제관계연구원장이 동아일보와의 ‘신년 글로벌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한국 정부의 남북협력 노력과 관련해서도 “미국이 너무 기분 나빠하면 당연히 (남북협력을) 못 하고, 미국을 완전히 기쁘게 해주려면 (역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전망했다. 북-미, 그리고 미중 사이에 낀 한국의 어려운 처지가 여전할 것이란 의미로 읽힌다.
기자는 남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정상들이 직접 뛰는 비핵화 A매치(국가대표 경기)를 ‘북핵 월드컵’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한국이 강팀들에 ‘승점 3점’을 헌납하는 약체로 찍히지 않기를,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내기를 바랐다. 축구 국가대표팀은 러시아 월드컵에서 FIFA 랭킹 1위 독일을 2 대 0으로 꺾으며 온 국민을 감동시키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16강 진출’이란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옌쉐퉁 원장의 냉정한 평가를 보면서 ‘북핵 월드컵도 축구 월드컵과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타인이 내 운명을 좌우하기 전에, 용기 내어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 안주하거나 굴복하게 될 것 같아서요.’ 최근 안정적 대기업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중년의 지인이 보내온 메시지다.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보다 힘이 세지 않고, 지도자가 북한처럼 수십 년 통치할 수도 없다. 그런 우리에겐 ‘다시 시작할 용기’야말로 우리 삶과 운명을 위한 운전대이자 지렛대 아닐까.
한국 축구가 같이 예선 탈락한 독일 격파의 감격에만 취해 지낸다면 다음 월드컵에서 16강 진출, 또는 그 이상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북한 비핵화라는 원대한 목표로 출전한 북핵 월드컵도 마찬가지 아닐까. 감격과 흥분을 걷어내고 잘못된 건 없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철저히 진단하고 새롭게 단련해야 한다. 용기 있게 말이다.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