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가 우리 종묘 옆에 현대 유리 마천루를 짓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념적으로는 조선의 구심점이었고, 개념적으로는 간판 한옥인 종묘 옆에 고층 유리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언성 높은 논쟁이 들리는 듯하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보스턴 카플리(Copley)스퀘어에서는 일어났다. 우리의 ‘종묘’가 그들의 ‘트리니티 교회’였고, 새 유리 마천루가 그들의 ‘존 핸콕 타워’였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트리니티 교회는 미국 건축가들이 ‘유럽식 건축’에서 벗어나 ‘미국식 건축’ 을 표방하며 세운 전통 미국 건축 1호이다. 건축가는 헨리 리차드슨이다. 보스턴 출신의 건축가 리차드슨은 하버드대를 나와 파리에서 유학했다. 그는 유럽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미국 건축계에 ‘유럽식’ 건축과 ‘뉴잉글랜드식’ 건축을 혼합해, ‘리차드소니언(건축가 이름에서 유래) 로마네스크’라는 새로운 미국식 건축양식을 만들었다. 이는 당대 젊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국 건축사학자들은 트리니티 교회를 미국식 건축양식의 시초로 본다.
트리니티 교회는 보스턴 대표 광장인 카플리 스퀘어에 있다. 카플리는 구도심 상권 중심이니, 우리로 치자면 명동쯤 된다. 광장에는 트리니티 교회와 보스턴 도서관이 있고, 보스턴 박물관이 있었다(훗날 이전). 카플리는 역사적, 문화적, 상업적 중심지로 보스턴 자존심이었고, 오늘날에도 보스턴 자부심이다. 트리니티는 카플리 앵커 시설이다.
갈등의 발단은 프루덴셜 타워(52층, 준공 당시 보스턴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였다. 보스턴 기업이 아닌, 외지 기업이 들어와 카플리 서쪽으로 정사각형 타워를 지었다. 저층 벽돌 건축 동네인 보스턴에 혼자 우뚝 섰다. 타워는 ‘최대 면적, 최대 수익, 확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워진 박스 타워였다. 이는 역사와 예술과 지식으로 먹고 사는 보스토니언(보스턴 사람)에게 장사꾼 뉴요커(뉴욕 사람)가 가하는 선전포고였다.
핸콕 타워의 건축가인 헨리 카브는 최근 저서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프루덴셜 타워는 카플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듯 했다. 카플리, 너는 과거야. 이제, 이 도시의 미래는 나야!” 외침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보스턴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자기주장이 강한 탓이었고, 미학적으로는 ‘건축’이 아닌, ‘건물’인 탓이었다. 프루덴셜 타워는 카브의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뉴욕식 부동산 타워로 ‘자기 참조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건물이었다.
카플리는 프루덴셜에게 중심 상권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문화마저 빼앗겼다. 보스토니언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특히, 프루덴셜의 경쟁 회사이자, 보스턴 토박이 보험사인 존 핸콕이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다. 핸콕은 반격을 기획했다. 잠자고 있던 저층 동네인 보스턴에 프루덴셜이 고층 마천루로 일격을 가해 깨운 만큼 핸콕은 마천루로 응수하고자 했다.
핸콕이 선정한 대지는 바로 트리니티 교회 옆이었다. 트리니티 교회 옆에 핸콕이 유리 마천루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공개 되자, 보스턴 건축계는 술렁였다. MIT 건축 대학장인 로렌스 앤더슨과 하버드 건축 대학장인 호세이 루이 서트와 보스턴 리딩 원로 건축가 3인은 반대했다. 그들은 이렇게 명기했다, “현재의 물리적 조건(트리니트 교회 인접한 상황)으로는 그 어떠한 합리적인 건축적 솔루션이 도출 될 수 없다.” 시는 전문가 자문단 의견에 흔들렸다.
건축주인 핸콕도 밀리지 않았다. 시공 허가를 인가해 주지 않으면, 1만 2000명의 직원을 데리고 본부를 시카고로 이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새로운 화이트 컬러 서비스 산업 고용창출에 목말라 하고 있던 보스턴 시는 전문가들의 의견 대신 핸콕의 손을 들어줬다.
또 한 번의 위기가 시공 중 닥쳐왔다. 외장에 부착한 이중 유리 패널 다수가 길바닥에 떨어졌다. 유리와 유리 사이의 공기층에서 발생한 온실효과가 문제였다. 열변형력을 안쪽 유리가 받아 팽창하였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거울 효과를 위해 안쪽 유리에 부착한 반사 필름지가 안쪽 유리의 강성을 높여 열변형력이 바깥쪽 유리를 밀어낸 것이 문제였다. 전 세계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사건이었다. 카브는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위기였지만, 극적으로 살아났다.
이런 어려움조차 이겨내며 지어진 핸콕 타워는 트리니티 교회에 버금가는 랜드마크 건축이 보스턴에서 됐다. 보스턴 출신의 건축가 카브는 트리니티 교회의 존재감을 죽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최대한 지웠다. 그 일환으로 정사각형 타워 대신 평행사변형 타워를 세웠다. 덕분에 트리니티가 드러나고, 핸콕은 물러난다.
평행사변형 타워인 탓에 핸콕 타워의 코너는 예각으로 접혀 코너가 종이처럼 얇아 보인다. 타워의 좁은 면에 홈을 파서 검은색 스테인레스 스틸을 부착했다. 안 그래도 평행사변형의 타워라, 하늘로 치솟는 효과가 첨예한 데, 수직으로 패인 검은 철 띠가 전 층을 관통하며 타워의 날카로움을 더 돋보이게 한다.
핸콕 타워는 모더니즘 유리 박스 마천루처럼 이론으로 무장한 이념적인 건축도, 그렇다고 프루덴셜 타워처럼 수익만을 당기려는 상업적인 건축도 아니다. 주연이 되고자 하기 보다는 조연이 되고자 하는 건축이다. 자기 주장이 강한 건물이라기보다는 남의 주장을 세워주는 건축이다. 철저히 자기를 비우는 건축이다. 하늘의 상황에 따라 타워의 표정이 바뀐다. 그 결과,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던 카플리는 미래로 전진하는 계기를 연다.
이중원 건축가·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