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56세를 일기로 별세한 전태관과 김종진(56)이 처음 만난 때는 1982년 크리스마스이브, 12월24일이었다. 전태관이 서강대 경영학과, 김종진이 고려대 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때다.
당시 음악인들의 사랑방으로 통한 방배동 카페 ‘시나브로’에서 크리스마스이브 파티가 열렸다. 서강대 밴드 ‘킨젝스’에 몸 담았던 전태관은 그럼에도 입사 원서를 끼고 살았던 시절이다. 전태관의 드럼 연주가 마음에 들었던 김종진은 그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방배동과 신촌 등지의 클럽을 중심으로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하던 두 사람은 1986년 가수 김현식(1958~1990)의 3집 제작에 참여하면서 프로로 데뷔했다. 김현식의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가 됐다.
김종진은 30년을 돌아보면서, 10년 동안 매년 라이브 앨범을 한 장씩 낸 것을 특기했다. “태관이랑 10년 동안 스튜디오 앨범은 내지 말고, 라이브 앨범만 발매하자는 약속을 지킨 것이 뿌듯해요.”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봄여름가을겨울은 ‘밀림에 길을 터주는 팀’으로 평가 받는다.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천재 뮤지션’으로 통하는 정재일(36)도 처음에 이들의 눈에 띄었다.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하는 다른 밴드와 달리, 봄여름가을겨울은 전문 세션과 함께 팀을 꾸리는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음악적 색깔을 지키고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이들은 작품성을 내세우면서도 흥행에도 성공한 몇 안 되는 밴드다. 버스 타고 다니던 시절 ‘당시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차였던 ’그랜저‘를 한 손으로 핸들 돌리면서 1만석 공연장에 들어가는 대단한 뮤지션이 돼 보자’는 꿈도 이뤘다.
하지만 김종진은 “이제 그것도 이루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어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다 갖춰진 무대에서 음악을 해야지만 무대 위에서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제가 그리고 우리가 딛는 모든 땅이 무대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하다가 떠나면 약속을 지키는 것이죠.” 전태관은 결국 약속을 지킨 것이다.
김종진과 전태관은 블루스 등 흑인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성향은 달랐다. 김종진이 잘 노는 형 같았다면, 전태관은 귀공자 풍의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김종진도 ‘따뜻한 미소, 젠틀한 매너, 부드러운 인품’으로 전태관을 돌아봤고 대중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리더십이 있는 김종진이 팀의 대외 활동에 치중했다면, 믿음직했던 전태관은 팀의 운영을 맡는 살림꾼 같은 역이었다. 경영학과 출신답게 팀의 회계 관련 일들을 꼼꼼히 챙겼다.
김종진은 앨범 기획을 할 때마다 전태관에게 물었다. 최근 발매된 30주년 헌정앨범이자 전태관을 돕기 위한 음반이었던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법’을 기획하고 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종진은 앨범 발매 전 “저희가 앨범을 테이프로 만들 계획이에요. 그래서 태관 씨에게 3000장 찍을까, 3만장 찍을까 물었죠. 그랬더니 요즘 플레이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며 300장만 찍으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선생님, 아버님 같이 느껴지는 친구에요“라고 했다. 김종진은 결국 지난 20일 발매된 이 앨범의 한정판도 따로 냈다. 전태관의 말에 착안, 테이프와 카세트 플레이어를 포함한 스페셜 패키지를 내놓았다.
김종진은 ”어릴 때 생각한 우정보다 지금 생각하는 우정의 범위가 넓어졌어요. 많은 걸 알게 해준 친구“라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친구와 우정을 지켰고 고인을 여전히 기억하는 동료·선후배 뮤지션, 팬들이 있기에 마냥 겨울은 계속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대표곡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브라보 브라보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봄여름가을겨울은 계속된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