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 중복장애인 보호 사각지대]세상과 단절되는 중복장애인들
지난달 30일 서울 동작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시청각 중복장애인 자조 모임인 ‘손잡다’ 회원들이 수화통역사들의 손을 만지며 촉수화를 하고 있다. 이날 모임에선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에게 이르면 내년 1월에 발의될 ‘헬렌켈러법’ 초안을 설명했다. 왼쪽 끝에 마주 앉은 이가 박영수(가명) 씨와 김성기 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김 씨가 내려 박 씨의 손을 잡으면 아무런 표정이 없던 박 씨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앞을 보지도, 들을 수도 없는 박 씨를 데리러 온 김 씨 역시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농아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만지며 대화한다. 이를 ‘촉수화’라고 한다.
김 씨가 박 씨를 차에 태우고 매주 금요일마다 찾는 곳은 서울 동작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열리는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의 자조 모임 ‘손잡다’다. 지난해 4월 시작된 ‘손잡다’는 국내에 두 개뿐인 시청각 중복장애 자조 모임 중 하나다.
○ 어둠에 갇힌 시청각 중복장애인의 삶
박 씨는 어릴 적 귀를 다쳐 농아인이 됐다. 간단한 수화로 가족과 의사소통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 점차 시력을 잃는 유전병이 발현해 10년 전부턴 앞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자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에 갇혔다. 아내는 떠났고 자녀들이 일을 나갈 때면 그는 늘 혼자였다. 가끔 바람이라도 쐬고픈 마음에 집 밖으로 나서 보지만 화를 당하기 일쑤였다.
박 씨의 딸은 “아빠가 오토바이에 치이거나 차바퀴에 발이 깔리는 등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당했다”며 “주변을 더듬다가 오해를 사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장애인인 걸 알고는 뒤통수를 후려치고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백화점 판매직원으로 일하는 박 씨의 딸이 근무 도중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뛰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박 씨의 집엔 온갖 종류의 상해로 병원을 다녀온 영수증이 한 묶음 쌓여 있다.
박 씨는 하루 8시간 일상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사’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손잡다’ 모임에 나가면서 비로소 활동 지원 제도를 알게 됐다. 뒤늦게 활동지원사를 신청했으나 심사 기간만 수 주가 걸렸다. 심사 담당 직원이 여러 차례 그의 집을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지만 그는 ‘띵동’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사각지대에 놓인 한국의 ‘헬렌 켈러들’
흔히 시청각장애를 ‘시각+청각’ 장애로 생각하지만 시청각 중복장애는 시각이나 청각장애와는 전혀 다른 가장 심각한 중증 장애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국내 장애인 관련법에선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을 위한 별도의 규정이나 맞춤형 제도가 없다.
김종인 나사렛대 재활복지대학원장은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농학교 중 한 곳을 선택해 찾아가지만 어디서도 제대로 된 교육이나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통상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는 청각 위주의 교육과 서비스가 이뤄지고 청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시각 위주의 교육이나 서비스가 제공되는데, 시청각 중복장애인은 양쪽 어느 쪽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법률로 시청각 중복장애를 별도 유형의 장애로 규정해 지원하고 있다. 헬렌 켈러를 계기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시청각장애인 교육 및 지원 제도를 갖춘 미국에서는 시청각장애아가 태어나면 전문특수교사가 가정을 방문해 촉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소통하도록 교육한다. 국립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이 스스로 쇼핑을 하고 요리를 하는 등 자립할 수 있도록 생활교육을 제공한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