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종 만든 원광식 주종장
《해마다 섣달 그믐날 밤 12시이면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서는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제야(除夜)의 종’ 행사가 열린다. 원래 1468년 제작된 보신각종(보물 제2호)을 쳤으나 균열이 생기는 등 타종이 어려워지자 새 보신각종을 제작해 1985년 8·15광복절 40주년 기념 타종 행사 때부터 사용해 오고 있다. 이 새 보신각종을 만든 이가 2016년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복원에 성공한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원광식 주종장(76·鑄鐘匠)이다. 하지만 정작 경내에 있는 내력비에 그의 이름은 없다.》
26일 충북 진천 성종사 공장에서 자신이 만든 종을 살펴보고 있는 원광식 주종장. 그는 에밀레종, 상원사 동종을 복원하고 1997년에는 그동안 맥이 끊겼던 ‘밀랍 주조공법’ 재현에 성공하는 등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범종 제작의 1인자다. 2007년 모 증권회사 TV 광고에 출연해 “이 사람아, 혼을 담아야 천년의 소리가 나오는 거지. 잔재주 부리면 끝이야, 끝”이라는 대사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진천=최혁중 기자sajinman@donga.com
이진구 논설위원
―새 보신각종을 만든 이유와 사람을 기록한 비에 이름이 없더군요.
“아, 그게 사람들하고 엄청 싸우고 옥신각신하다가 내 이름은 빼라고 했지요.” (싸우다니요?) “새 보신각종을 설계는 서울대 공대 생산기술연구소, 디자인은 서울대 미대에서 했는데 종에 넣을 무궁화 문양이 이상했어요. 뿌리에 꽃이 바로 달렸더라고? 디자인도 시원찮고…. 이상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추상이라고 하더라고. 종이란 게 한번 만들면 천년을 가는 건데 문양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니라고 대판 싸우고 보름간 일을 안 했지요. 그때가 1984년 이맘때인데 기흥 작업장으로 이종찬 씨가 갑자기 찾아오더군요.”
―국가정보원장을 했던 그 이종찬 씨를 말합니까?
“네. 그땐 민정당에 있었고, 보신각종 중주위원회 운영위원인가를 했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위원장이었지요. 아, 글쎄 ‘각하가 광복 40주년에 맞춰 쳐야 하는데 왜 안 만드느냐’고 하더라고. 그때 내가 일을 안 하니까 용인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작업장에 쫙 깔려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각하고 나발이고 대통령이 무서워서 작품 만드느냐. 돈 도로 줄 테니 딴 데서 만들어라’라고 들이받았지요.” (무사하셨나요? 멀쩡한 사람도 잡아가던 시절인데….) “전두환이 참석해서인지 광복 40주년 타종 행사를 엄청나게 큰 행사로 준비한 것 같더군요. KBS가 10달 동안 작업 과정을 모두 촬영했으니까. 근데 내가 일을 안 해 종 제작도, 촬영도 멈추게 되니까 급했나 봐요. 당시 서울신문사 사장이 서울 반포에 있는 팔래스호텔 14층 양주 코너로 부르더라고.”
―서울신문 사장이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첫 타종식에는 가셨겠지요.
“안 갈 수야 없죠. 내가 만들었으니. 거기서 전두환을 봤는데…, ‘자네가 그렇게 고집이 세다면서?’ 하더라고. ‘웃기고 있네’라고 했지.” (대놓고 그랬단 말입니까?) “아니, 속으로. 하하하.”
―새 보신각종은 기존 보신각종을 모델로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에밀레종을 모델로 했지요. 서울대 공대팀이 그렇게 설계를 했고, 복원 사업도 아니고 지금 시대의 종을 만드는데 굳이 과거의 것을 본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2006년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새 보신각종의 울림이 길지 못해 새 종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 종소리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 보신각은 (소리)환경이 너무 안 좋아요. 도심 한복판에 있으니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차가 그렇게 많이 다니는데 그런 소리가 종소리를 깎아먹어요. 제대로 들릴 수도 없고…. 또 어디는 땡, 어디는 쿵 하는 식으로 부위와 각도에 따라 소리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그냥 녹음하면 안 돼요. 조용할 때 산사에 있는 종은 정말 멀리 가지요. 아침 목탁 소리나 풍경 소리 같은 것도…. 공간이 소리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데…. 종소리가 뭔지 알긴 하는지….”
―우리 종은 ‘한국종’이라는 학명이 있을 정도인데 왜 함께 불교가 번성한 중국, 일본에서는 종이 발달하지 않았을까요.
※당좌(撞座)란 종을 치는 나무(당목·撞木)가 종에 닿는 곳을 말한다.
―오른쪽 눈이 안 보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17세 때 8촌 형님(고 원국진 선생)이 운영하는 종 만드는 회사(성종사)에 들어가 2년 정도 일했지요. 그때는 종에 대해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일자리로…. 그리고 제대 후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 8촌 형님이 몸이 안 좋았는데 자식도 없었어요. 하루는 형수님이 부르더니 대를 이어 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그땐 정말 정신이 번쩍 들어서 본격적으로 배우며 일했는데… 27세 땐가? 쇳물을 연결하는 파이프가 터지면서 쇳물이 눈에 튀어서 실명을 했지요. 그리고 쫓겨났고….” (친척이고 완전히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쫓겨나셨다고요?) “옛날에는 그런 거 없었어요. 하하하. 뭐, 한쪽 눈으로는 수평을 잘 못 보니까…. 근데 다 핑계지. 지금 같지 않아요. 그러고는 전등 갓(반사등) 만드는 일을 한 1년 했지요. 아주 잘됐어요.”
―잘됐는데 왜 다시 종을 만드시게 된 겁니까.
“주문은 많이 들어왔는데, 전부 외상이라…. 나중에 돈 받을 때가 되니까 전부 사라지더라고요. 그때 지인이 종 만드는 회사를 동업으로 차리자고 했지요. 양심상 내게 기술을 가르쳐준 곳이 성종사인데 말도 없이 할 수는 없어서 승낙을 받으러 갔더니 8촌 형님이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시작한 게 충남 예산 수덕사 종이었는데…. 대웅전 구석에 작업장 차려 놓고 혼신의 힘을 쏟았지요. 이 종을 만들어야 내가 산다는 심정으로….”
“종을 한 번 치면 소리가 2분 30초를 가고, 30리에 퍼진다는 평을 받았지요. 되느라고 그런 건지 당시에 불국사에서도 범종을 만들었는데 수덕사와 경쟁이 붙었어요. 광복 이후 가장 큰 종을 누가 먼저 만드는가를 놓고. 수덕사 종이 약 4t인데 지금 보면 작은 거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죠. 내가 먼저 만드니까 그때 신문 방송에 며칠 동안 뉴스가 났는데 그러고는 전국에서 제작 의뢰가 쏟아졌어요.”
※원 주종장은 이후 8촌 형님이 운영하던 성종사를 1973년 인수했다.
―에밀레종을 복원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워낙 유명한 소리니까…. 복원한 종이 그 소리를 따라잡지 못하면 난 죽는 거라고 생각했지요. 내 인생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2년여간 고생했는데, 그래도 우연의 일치인지 99.9%는 맞았다고 생각해요. 마누라는 ‘당신하고 살면 쪽박 찬다’고 하지만…. 하하하.” (왜요?) “15억 원 받았는데 실제는 20억 원이 들었거든. 더 준다고 했지만 됐다고 했지요. 종만 제대로 만들면 나는 기쁘지요.”
―에밀레종을 치면 ‘에밀레∼’ 소리가 난다던데….
“듣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들을 수도 있죠. 우리나라 종소리에서는 몇 초 주기로 소리가 작아졌다 다시 커지는 ‘맥놀이’가 일어나는데 그 울림을 듣다 보면 ‘에밀레’로 들리기도 해요.” (녹음된 걸 아무리 들어도 그렇게 안 들리던데, 혹시 들리십니까?) “허허허, 난 뭐…, 음…. 그렇게 생각하고 들으면 들린다니까. 하하하.”
※진동수가 거의 같은 두 소리가 중첩돼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는 현상을 맥박이 뛰는 것 같다고 해 ‘맥놀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종은 ‘우∼웅∼우∼웅’ 하며 소리가 크고 작아지기를 반복해 긴 여운을 남긴다.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스스로를 주철장(鑄鐵匠)이 아닌 주종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나는 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주철장은 틀에 쇳물을 부어 여러 물건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말하는 거고요. 나라에서도 주철장이라고 부르고 지금까지 모든 언론에서 주철장이라고 써 왔지만 난 주종장으로 불렸으면 해요.”
―좀 무식한 질문입니다만, 종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50여 년을 물고 늘어지며 만들었는데 아직도 모르겠는데…. 안 풀리는 수수께끼도 너무 많고…. 예를 들어 종의 모든 부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만들면 소리가 좋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더 이상해. 공기 중의 수분에 의해서도, 마르는 과정에서도, 또 주물을 붓는 과정, 문양의 모양 등등에서 알게 모르게 종이 ‘짱구’가 지는데 그 비대칭 속에서 희한하게 좋은 소리가 나오니까. 아직도 모르겠어요. 과학 가지고 안 되는 분야가 이 분야지요. 그저 내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종이 답한다고 여길 뿐….”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