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새해 특집]3·1운동 100년 상하이 임정을 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이 1921년 1월 1일 중국 상하이의 영안백화점 옥상에서 찍은 신년축하식 기념사진을 지난해 12월 28일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이 백화점 옥상에 세우고 촬영했다. 상하이=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기념촬영을 위해 일품향 옥상에 오른 임정 요인들의 눈앞으로는 당시 경마장이 펼쳐져 있었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임정 인사들은 광활한 경마장이 표상하는 서구 열강의 힘을 절감하면서 부강한 독립 국가를 꿈꿨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마장 자리는 오늘날 상하이의 대표적 명소인 런민(人民)광장이다.
임정은 1920년 당시 사진 속 위치에 맞춰 별지에 명단을 인쇄해 함께 배부했다. 임정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이런 사람들이 여기 모여 독립투쟁을 다짐했으니 여러분도 힘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타 지역 독립운동단체에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을 취재한 해일생(海日生)이란 필명의 독립신문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삼삼오오로 헤어져 가는 우리 형제의 얼굴에는 새 용기, 새 결심, 새 희망의 빛이 빛나다. 내일부터는 더욱 조국을 위해 성충(誠忠)을 다하리라.”
임정은 이듬해 1921년 1월 1일에는 상하이의 대표적 번화가인 난징둥루(南京東路)에 있는 영안(永安)백화점에서 신년축하회를 열었다. 프랑스조계 대한교민단 사무소에서 간단한 축하식을 치른 뒤 대동여사 대채루(大菜樓)에서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임시정부가 1921년 3월 1일 중국 상하이 올림픽극장에서 성대하게 개최한 3·1 독립선언 2주년 기념식 모습(위쪽 사진). 현재는 아래쪽 사진처럼 오피스 건물이 들어서 있다. 상하이=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여러 대 자동차에 나눠 타고 국기를 높이 내건 뒤 벽력같은 만세소리로 하비로를 질주하고…러시아인은 ‘우라’(만세)를 부르고, 영미인은 모자를 두르며, 중국인은 박수로 환영하는데 일본인은 비슬비슬 보기만 하였다고.”
1920년 기념식 행사 뒤 한인 청년들이 벌인 자동차 시위를 묘사한 독립신문 기사다. 시위대는 프랑스조계 하비로와 공공조계 서장로를 지나 남경로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더 나아가 일본인이 밀집해 살던 홍구 지역의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시위를 했다. 당시 일본 관헌들은 경악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시위는 이듬해인 1921년과 1923년 3·1절 기념식 때도 재연됐다.
○ 광복 50주년, 동아일보가 보도한 임정 58인 실명
1920년 임정 신년축하회 기념사진 인물 명단 확인을 보도한 1995년 동아일보 1월 1일자 3면. 동아일보DB
이전까지는 등장인물 가운데 20여 명만 신원이 파악돼 있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는 사진에 등장하는 58인의 명단을 발견한 사실을 1월 1일 신년호에서 보도했다. 본보는 이 별지 명단을 일본 외무성 사료관의 자료 속에서 한일 근대사 연구가 최서면 씨가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사진과 별지 명단은 1920년 2월 14일 일본의 간도총영사관이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간도일본경찰은 임정 국무원 비서장 김립의 동생인 김철용의 가택을 수색하던 중 압수했던 것이다.
당시 상하이 일본영사관은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해 지도급 인사 말고는 거의 파악하지 못했다. 기념사진만 입수했고, 별지 명단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광재 편사연구관은 “이로 볼 때 일본영사관이 밀정을 활용해 프랑스조계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진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종래의 설명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국내의 교통부와 연통국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면서 임시정부는 재정난을 겪었고, 1922년 이후 임정이 신년축하회를 성대하게 열었다는 기록이나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 당시 랜드마크 영안백화점은 도산선생 즐겨 이용… 현재 메트로폴로 호텔선 백범-윤봉길 마지막 점심 ▼
상하이 곳곳 독립운동 흔적
독립임시사무소가 있던 당시 하비로 329호의 현재 모습. 상하이=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저서 ‘근현대 상해 한인사 연구’(경인문화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독립임시사무소의 현 위치도 밝혔다. 1919년 민족 대표의 위임을 받고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한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1880∼1968) 등이 여기서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한편으로 임정 수립을 준비한 역사적 장소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대표적 번화가인 난징둥루(南京東路)에 있는 영안(永安) 백화점이다. 당시 주소로 공공조계 남경로(南京路)에 있던 이 백화점은 상하이의 랜드마크였다.
현재의 메트로폴로 호텔(시짱난루·西藏南路 123호)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의거 전날 백범과 점심을 먹으며 거사를 협의한 곳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상하이 YMCA 사무소가 있다. 윤 의사의 의거 뒤 백범 김구를 숨겨준 피치 목사가 YMCA 간사를 지냈다. 윤 의사가 의거 당일 폭탄을 건네받고 백범과 함께 아침을 먹은 독립운동가 김해산(金海山)의 집(안탕로·雁蕩路 원창리·元昌里 13호)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정의 초기 주요 행사가 열린 기념식장은 대체로 공공조계에 있다. 당시 공공조계는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 한인 독립운동가에게 극도로 위험한 지역이었다는 일반적 인식과는 괴리가 있다. 김 연구관은 “열강을 의식한 일제도 독립운동가 체포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공공조계가 초기부터 위험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한인들은 일상생활, 기념행사, 생업 등을 위해 공공조계에 일상적으로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상하이=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