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제24화>경기 양평
‘3·1운동 역사의 현장’ 연재 2일부터 주2회로 늘립니다
《 한반도 남쪽에서 북쪽 끝까지, 만주벌판에서 미주 지역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꼭 100년 전이다. 3·1운동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일으킨 사람들은 역사책에 기록된 인물만이 아니다. 우편소 사무원, 음식점 직원, 자전거 수선업자 같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한목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동아일보는 지난해 격주로 연재하던 뜨거운 3·1운동 만세 현장 탐방을 올해 주 2회로 늘려 연재한다. 》
양평군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9일 만인 3월 10일 시작돼 4월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오늘날의 양평물맑은시장은 그해 3월 24일 대규모 만세운동이 열렸던 갈산장터다. 2016년 이곳에서 3·1절 기념행사 참가자들이 만세운동을 재현했다. 양평군 제공
동아일보 1926년 11월 25일자 2면에 ‘이신규씨 장서(長逝)’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스물일곱 살 청년의 부고 소식이었다. 그는 7년 전 경성지방법원 경사부의 징역 선고를 받고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정치에 관하여 많은 군중과 함께 불온 행동을 함으로써 경기도 양평군의 안녕을 방해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 치밀한 작전, 갈산장터 만세운동
100년 전 1000여 명의 군중이 목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양평읍 장터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모였다. 지난해 12월 24일 윤기영의 손자인 광복회 지회장 윤광선 씨, 여광현의 손자 여학구 옹, 변준호의 손자 변도상 3·1운동기념사업회장(왼쪽부터)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 양평=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3월 24일 갈산장터의 만세운동은 조직적이었다. 운동의 본부는 양평 중서부에 있는 칼산에 두었고, 양평 각지의 주민들이 긴밀하게 연락해 임무를 나눴다. 떠드렁산과 역전 뒷산, 군청 뒷산에 잠복한 사람들은 읍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기로 했다. 만세운동을 피해 도망가려는 사람을 발견하면 징을 울리도록 했고, 이들을 향해 돌을 던져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대기조도 있었다. 장원석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연합으로 이뤄진 운동”이었다.
서종리에 거주하던 청년 김영일(1896∼?)은 태극기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태극 문양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그는 대접을 가져다가 엎어 놓고 원을 만들어 태극기 100여 개를 제작했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를 치롱(싸리 가지로 만든 독 같은 것)에 넣고 돌멩이 몇 개로 눌러 놓은 것을 등에 지고 김영일과 동네 사람들은 읍내 장터로 떠났다(‘양평3·1운동사’). 서울에서 온 이신규가 다다른 곳이기도 했다.
‘지금에 각 경찰서에서 형벌을 당하는 형제자매를 미련한 무리처럼 보고, 또 태황제(고종) 폐하를 암살하였다. 2천만 동포는 나라 없고 임금 없는 백성이 된 지 이에 10년의 능역을 당하였다. 나라 없는 노예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총·칼 밑에서 죽는 것만 못하다. 독립의 시기는 왔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자결을 하고 독립기를 높이 게양하여 형별 속에 있는 형제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잘게 토막쳐 우리들의 마음속을 상쾌하게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 동포여! 이시기를 놓치지 말고 독립기를 번득이고 맹렬히 분기하여 독립하라.’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사람들은 한 손에 뜨거운 문장으로 가득한 격문을, 다른 한 손에 태극기를 받아들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이 절로 터져 나와 장터에 울려 퍼졌다.(‘독립운동사 2권 3·1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엮음)
탄탄한 기획에 따라 진행된 만세운동의 파급력은 커서, 닷새 뒤 강상면 교평리의 나루터에 모여 양평읍장에 가려던 사람들 사이에선 ‘조선 독립을 세계 각국에서 이미 승인하였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송학리에 거주하던 신석영(1881∼1960)은 나루터에 누군가가 세워 놓은 태극기를 들고 “여러분,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기쁘지 않소!” 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 100여 명도 여기에 호응해 만세를 불렀고, 나루터 주변은 순식간에 만세운동의 장으로 바뀌었다. 만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신석영은 재판장에서도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다고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부른 것이 왜 잘못이냐”면서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열혈 청년들도 눈부셨지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노익장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한제국군 오위장(五衛將·입직(入直)과 행순(行巡: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일) 및 시위(侍衛)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오위의 으뜸 벼슬) 출신이었던 최대현(1862∼1931)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그는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거느리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월 31일 고향인 양평군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 날엔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 모인 2000여 명과 함께, 4월 3일엔 강상 강하 양서 고읍 4개 면 주민 4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했다. 그는 이후 군중을 이끌고 옥천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일흔에 가까운 고령이었음에도 4개 면을 넘나들면서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다. 특히 양서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 때 함께했던 아들 최윤식이 일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지만 최대현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양평3·1운동사’).
○ ‘응답하라 1919’
기자가 지난해 12월 24일 찾은 양평읍의 만세터는 단정하게 조성돼 있었다. 양평물맑은시장 한가운데 있는 장소다. 함께한 변도상 양평3·1운동기념사업회장은 “주말이면 이곳에 장도 서고 공연도 열린다”고 했다. ‘광장’의 뜻이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만나거나 모일 수 있는 자리’임을 떠올리면, 만세터는 100년 전에도 현재도 광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양평군청은 2016년 이곳에서 갈산장터의 3·1운동을 재현하기도 했다.
변 회장의 조부는 독립운동가 변준호(1895∼1966)다. 고국에서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변준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 지원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을 고국에 두고 유학을 떠났다는 조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귀국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1993년 의정부보훈지청을 통해 처음 들었어요. 광복 뒤 미군정의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돌아오지 못하셨지요.”
만세터에서 만난 여학구 옹(87)은 16대째 양평에서 살아 왔다고 밝혔다. 그의 조부는 여광현(1885∼1962)으로 강상면과 옥천면, 양서면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가다. 여광현은 몽양 여운형의 친조카다. 여운형의 고향인 양평에는 그의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여운형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여광현과 여운긍 등은 양평 곳곳을 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태형을 선고받았다. 여학구 옹은 어렸을 적 늘 병석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양평은 3·1만세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100년의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고 있다. 지난해에는 ‘응답하라 1919’라는 제목을 내건 마중사업으로 세 차례에 걸쳐 강연회를 개최했고 청소년 대상 3·1운동 기념동영상 공모 사업도 열었다. 올해엔 2월 23일 양평문화원에서 ‘양평의 근대, 3·1에서 만나다’를 주제로 몽양과 양평의 만세운동을 관통하는 역사적 맥락을 짚는 포럼을 개최한다. 3·1절 행사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카퍼레이드와 함께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연극 등 만세운동을 소재로 한 예술 무대가 펼쳐진다. 4월 3일 양평 장터에선 3·1만세 횃불제가 열린다.
양평=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1부
<1> 중국 상하이의 비밀국제조직 동제사
<2> 일본 도쿄의 2·8독립선언서<3> 독립선언서의 원조 ‘대동단결선언’
<4> 중국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
<5> 천도교 비밀결사체 ‘천도구국단’
<6> 3·1운동 모의한 중앙학교
<7> 천도교-기독교-불교 ‘3교 연대’
<8> 독립선언서 인쇄 현장 보성사
<9> 요릿집 태화관이 독립선언 장소가 된 까닭
<10> 탑동공원의 만세 소리
<11> 일제 철옹성 깬 3·1운동의 비폭력주의
<12> 학생 연대, 서울역의 제2차 만세운동
<13> 3·1운동의 자금줄
<14> 민족대표 48인, 한용운의 옥중투쟁
<15> 수원 방화수류정의 횃불운동
<16> 수원 기생의 만세운동
<17> 서대문형무소의 8호 女감방
<18> 강화도의 의병 투쟁과 3·1운동
<19> 경기 가평,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운동
<20> 경기 안성, 일제로부터 해방구 되다
<21> 충남 당진, 유생과 면장까지 가담
<22> 경기 용인, 잊혀진 독립유공자 16인 발굴
<23> 북간도 용정, 해란강의 3·13만세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