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논설위원
국채를 발행해 그 돈으로 경기를 살리거나 복지를 늘리는 데 사용하자는 논리에는 찬반이 엇갈릴 수 있다. 이런 정책적 판단보다 이전 정부의 실적에 미리 먹칠을 하자는 ‘정무적’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크다. 사무관의 주장대로라면 국장 이하 실무자들의 반대로 국채 발행이 결국 무산됐다고 하지만 김동연 경제부총리 등 고위 관료들의 ‘정무직 지시’가 한심하다. 김 부총리는 예산실에 오래 근무하면서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강조해온 재정기획 및 전략통이다. 나도 한 토론회에서 김 부총리 본인이 이전 정권에서 재정건전화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걸 자랑스럽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부총리가 국채 조기 상환을 막고 오히려 빚을 늘리는 지시를 했다면 어느 후배 관료라도 정책에 대한 부당함과 함께 인간적인 배신감도 느꼈을 것이다.
새로 임명된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정무적’ 성향은 전임자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김 전 부총리가 때로는 몸을 낮추면서도 때로는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과 부딪치는 강단도 보였다면 홍 부총리는 미리 알아서 상사에게 잘 맞춰주는 스타일이라는 말도 있다. 홍 부총리가 2기 경제팀장으로 정치적 압력에 대한 방패막이가 되는 한편 정통 관료들과 함께 경제 살리기 정책에 전력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어제 문재인 대통령은 “더 많은 국민이 공감할 때까지 인내할 것”이라며 현재의 경제정책을 계속 밀고 갈 의사를 밝혔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예견한 대로 이제까지 긍정적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많이 속출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자영업자, 중소기업인, 청년들이 계속 같은 실험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책의 발부리에 걸려 누군가 비명 소리를 낸다면 일단 멈춰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 정도가 아닌가 싶다. 혹여 정치적 우군의 눈치가 보여 대외적인 포기 선언이 어려웠다면 포용적 성장이라는 간판은 유지하면서도 경제 활력을 살리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책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올해는 돼지해다. 좋은 덕담도 많겠지만 우리 경제에는 덕담을 나눌 여유보다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해다. 2010년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국가부도의 날에 직면해 ‘돼지들’이란 조롱을 받았던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전철을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닌지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 올 상반기가 이 정부에서 적어도 선거를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고 정책을 손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