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논설위원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서 받았다는 ‘멋진 친서’는 더 절절할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로 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라면서 자신의 ‘진심’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이어진 문장이 걸리긴 한다. “미국이 우리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들고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난데없이 ‘새로운 길’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명백한 경고겠지만, 주어는 ‘우리’로 바뀌었고 표현도 매우 조심스럽다.
김정은이 2013년부터 매년 내놓은 육성 신년사의 주어는 늘 ‘우리’였다. ‘나’는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하길 축복합니다”처럼 인민이나 군대에 보내는 격려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변화가 나타난 것은 재작년이다.
김정은은 말미에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인민을 어떻게 더 높이 떠받들 수 있겠는가 하는 근심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한 해를 보냈는데…”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는 인민의 참된 충복, 충실한 심부름꾼이 될 것을 엄숙히 맹약하는 바입니다.” 비록 악어의 눈물일지언정 ‘수령 무오류’의 독재체제에선 파격이었다.
작년에는 평창 겨울올림픽의 성공을 거론하면서 남북관계에 ‘나’를 내세웠다. “나는 올해에 북과 남에서 모든 일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올해, 김정은은 대미관계에 ‘나’를 앞세웠다.
김정은의 언어는 교묘하다. 이번 트럼프를 향한 ‘나’의 메시지엔 치명적 유혹이 숨겨져 있다. 북-미 협상을 어렵게 하는 참모진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끼리 담판 짓자며 트럼프를 충동질한다. 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도 그랬다.
옥신각신 험악한 분위기에서 콜린 파월 국가안보보좌관이 테이블 아래로 레이건에게 쪽지를 건넸고, 레이건은 회의장 한쪽에 참모들을 모아 협의한 뒤 “내 대답은 노(no)다”라고 분명히 했다. 그제야 고르바초프도 단념하고 레이건을 기자회견장으로 안내했다. 파월이 건넨 메모는 이랬다. “그건 앞으론 그들을 비판하지 않겠다고 동의하는 겁니다.”
트럼프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 참모들의 완강한 반대도 귓등으로 흘린다는 트럼프라서 드는 의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