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25화>대구-혜성단
비밀결사 단체인 혜성단을 조직하고 가동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대구 계성학교(현 계성중고교) 출신들이다. 사진 속 건물은 계성학교 아담스홀로, 1919년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학생들이 이 건물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 등을 비밀리에 등사했다. 지금은 계성중 교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아담스관이란 이름은 학교 설립자인 제임스 E 애덤스 선교사가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5호로 등재돼 있다. 대구=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경북 지역에서 3·1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대구였다. 1919년 3월 8일 시작된 대구 만세운동은 3월 말까지 이어졌다.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등의 학생들이 주축이 됐다. 하지만 일제의 강경 진압과 친일 단체의 준동으로 만세운동은 쉽지 않았다. 이때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가 ‘혜성단(慧星團)’이다. 당시 재판부는 혜성단원인 김수길(당시 19세·계성학교 4학년) 등에 대해 ‘비밀결사를 조직해 대구에 본부를 두고 경성, 상주 기타 각지에 지부를 설치해 동지를 규합하고, 경고인쇄물을 각 관공서장 앞으로 보낸 죄’로 이같이 판결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는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자제단(自制團)’이란 친일단체를 조직했다. 당시 전북도 장관을 지냈던 친일파 이진호(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총독부 학무국장을 지냄)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 총독에게 ‘민간 유지자(維持者)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을 진정할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만세운동을) 유혹하는 자를 검거할 것을 서약하게 만들자’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을 자제하자’며 스스로 자제단을 만든 것이다.
자제단은 지역에 따라 ‘자성회(自省會)’라고도 불렸다. 주로 남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직됐다. 설립 목적은 3·1만세운동 참가자 검거, 관련 정보 수집 및 대민(對民) 설득을 통해 민중들을 만세운동에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이유로 자제단 단원들은 모두 밀고 의무가 있었다. 1919년 4월 6일 결성된 대구 자제단 규약(제3조)은 ‘만세(운동)에 부화뇌동하지 말도록 부민(府民)을 굳게 타이르고, 만일 불온한 행위를 감행하는 자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당장 경무 관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대구 자제단 발기인 67명 가운데 신원이 파악된 27명 대부분이 지주, 관리, 자본가 등 친일인사들이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다시 자신의 노비와 소작농,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켰다. 또 이들을 이용해 만세운동 참가자와 조직을 색출했다.
자제단 조직은 1919년 7월까지 울산, 전북, 수원 등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고, 일본 경찰 대신 만세운동을 진압하거나 시위 참여자를 귀가시키는 일을 했다. 초기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만세운동에 당황했던 일제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데는 이들 자제단의 역할이 있었다.
자제단 지도부는 기회주의적인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을 종교처럼 신봉한 골수 친일파들이었다. 특히 자제단을 조직했던 박중양(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냄)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라고 적을 정도로 골수 친일파였다. 그는 자제단 설립으로 훈장을 받고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냈다.
○ “어째서 무고한 동포를 검거했느냐”
김수길 등 혜성단원들에 대한 당시 판결문.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주축이 돼 3월 8일과 10일 2차례의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일제는 대구고보 신명여학교 계성학교 등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시내에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를 출동시켰다. 이런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독립운동은 지하에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심에는 혜성단이 있었다.
혜성단은 당시 대구경찰서장인 시라이 요시사부로(白井義三郞) 앞으로 “어째서 너는 3월 8일 한국독립만세를 부른 무고한 동포를 검거했느냐. 너는 생사 어느 쪽을 원하느냐. 너희들 같은 사람은 경무부장과 함께 암살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각오해야 한다”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냈다. 또 자제회 설립에 앞장서던 박중양에게 “시세에 적응하기 위한 자제회를 설립하고, 다수의 사람을 강제 권유하여 입회하게 함은 조선민족으로서 유서(宥恕·너그럽게 용서함)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기 때문에 암살해야 한다”는 내용의 경고장을 보냈다.
혜성단은 대구에 본부를 두고 경성과 만주에도 지부를 설치했다. 인쇄책으로는 최재화 김수길, 인쇄물 배달책으로는 허성도 이덕생 이종식 이종헌 이기명이 각각 활약했다. 자금 출납책은 이수건, 만주 출장책은 이영옥 등이었다. 혜성단의 목표는 유인물 배포를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자산가들에게 독립운동 자금 헌금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일반 민중에게는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요구했다. 상인들에게는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를 호소했다. 또 궁극적으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내외가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가들과의 연결도 모색했다. 혜성단원을 만주에 파견해 항일투쟁을 이어가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혜성단의 활동은 당연히 일본 군경의 눈엣가시였다. 결국 결성 한 달여 만인 5월 중순까지 주축 인물들이 차례로 검거되는 아픔을 맞는다.
혜성단은 기존 만세운동과 함께 시장 상인들을 설득해 철시투쟁도 이끌어냈다.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감에서였다. 당시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해 국내 3·1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이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돌려주고,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켰다. 또 불가리아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영토의 일부를 돌려줬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이 회의에 대한 기대가 컸다. 혜성단 또한 당시 대구에 와 있던 서양 신문기자들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대구는 물론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혜성단원이던 이종식은 그해 4월 7일경 자신의 집에서 ‘서양 신문기자가 시내를 순찰하는데 우리들이 독립자유를 원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내일 8일은 아침 일찍부터 철시(撤市)하고 폐점하라’는 내용의 유인물 300통을 작성해 배포했다. 이종식은 유인물에서 ‘(철시 및 폐점 상황이) 신문기자들 손에서 프랑스 파리 열국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고, 다시 구미 각국 신문에 게재되면 우리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일본 상인과 금전 및 물품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신문지상에 전해진 총독부의 유고(諭告·타일러 훈계함), 기타 경찰관의 전달 등은 어느 쪽이나 모두 허구의 사실로 이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사실 혜성단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들의 축제 잔치인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이긴 연합국 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에서의 자발적 만세운동이 세계 여론을 움직이는 데 보탬이 된다는 신념으로 죽음을 각오한 항쟁을 전개한 것이다.
▼ 3·1운동 대구 확산 주도… 숱한 항일투사 배출 ‘독립운동 요람’ ▼
혜성단의 주축 ‘계성학교’
기소된 단원 13명 중 9명이 동문, 대부분 학생-교사 만세운동 참여
휴교 조치 당했다가 이듬해야 풀려
기소된 단원 13명 중 9명이 동문, 대부분 학생-교사 만세운동 참여
휴교 조치 당했다가 이듬해야 풀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했던 계성학교 지하실.
계성학교 출신들의 항일운동은 혜성단이나 대구 지역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의 3·1운동이 대구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계성학교 출신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8일, 대구 큰장(서문시장) 장날이던 이날 학생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복을 입거나 장사꾼 차림으로 변복하고 시장 안으로 숨어들어가 만세운동을 벌였다. 만세운동으로 계성학교는 휴교 처분을 받았고, 대부분의 교사와 학생이 체포, 투옥됐다.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기록한 ‘조선소요사건 상황―경상북도 편’에는 이 같은 상황이 잘 기술돼 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사립학교 중 소요로 인하여 아직까지 휴학하고 있는 곳은 안동군 사립협동학교 및 대구 기독교부속 계성학교 2개교이며, 그 밖에 청도군 사립문명학교, 문경군 금룡사 지방학림, 달성군 동화사 지방학림은 20일 내지 1개월간 휴교하기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모두 개교하였다’고 밝혔다. 계성학교는 이듬해인 1920년 4월에야 개교할 수 있었다. 또 ‘독립운동사 자료집 3·1운동 재판기록―경상남북도 편’에 따르면 1919년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형을 받은 76명 가운데 44명이 계성학교 출신이었다. 계성학교 100년사에 따르면 대구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19년 3월 7일 계성학교 전교생이 46명이란 것을 고려할 때 이들의 참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잘 알 수 있다.
계성학교 출신들의 항일운동은 3·1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그 뒤로도 이어졌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계성학교 출신인 이원우 조활용 등은 농림학교 김을용, 경북여자고보 곽진숙 권유진 등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항일운동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소속 학교 학생들을 달성공원까지 동원할 것과 만세시위운동의 행진 순서 등을 포함한 세부 계획까지 세웠으나 일제에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5학년이던 권성우는 경북 의성군의 의성 장날 궐기하려다 발각돼 대구형무소로 압송됐다. 그는 6개월 형에 3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는데 이후에도 요인 암살을 기도하다 동료들은 죽고 자신은 만주로 망명한 뒤 광복단원으로 활동했다. 졸업생인 박재현도 1919년 3월 8일과 10일 두 차례 만세운동에 참여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출옥 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 평안남도 도청 폭파 혐의자로 체포됐으며, 이후 밀양 집성 사랑학교에 재직하면서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에 협조하다 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대구=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