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故임세원 교수 비극이후 공포 번지는 진료현장
중무장한 서울대병원 보안요원 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진료실 앞에서 보안요원 2명이 경계를 서고 있다. 이들은 방검조끼를 입고 허리에 삼단봉을 차고 있다. 서울대병원 제공
그는 B 병원장에게 다짜고짜 “너희 병원에서 날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먼저 너를 죽이러 왔다”고 소리쳤다. A 씨 손에는 껌 제거용 칼이 들려 있었다. B 병원장은 칼을 막다가 손목을 크게 다쳤다. 이때 비서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A 씨를 붙잡았다. A 씨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서울의 대학병원 상당수는 병원장실 문을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문으로 교체했다. B 병원장은 “테러를 당한 뒤 그 충격으로 3개월을 휴직했다. 한 달 동안 불안증으로 잠을 자지 못해 정신건강의학과 약을 먹었다”며 “지금도 약물을 복용하고 있고, 불안한 마음에 가스총을 구입해 갖고 다닌다”고 토로했다.
○ 진료 현장이 공포로 변한 의사들
병원 응급실 내 폭행은 이제 새로운 뉴스가 아닐 정도로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12월 31일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환자의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의료계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사실 의사가 환자의 흉기에 희생된 사건은 임 교수가 처음이 아니다. 2008년 6월 충남대병원에서 치료 결과에 불만을 품은 환자가 퇴근하던 담당 교수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2009년 11월에는 강원 원주시 비뇨기과 의원에서 외래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간호사 2명이 숨졌다.
2012년 8월 경남 양산시의 한 병원에선 정신질환을 앓던 환자가 자신을 상담하던 여의사를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이듬해 2월에도 대구 수성구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 50대 환자의 흉기에 의사가 크게 다쳤다. 지난해 2월에는 충북 청주시에서 환자가 흉기를 휘둘러 치과의사가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있었다.
임 교수 살해 사건 직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강북삼성병원 의료진 사망 사건 관련 의료 안정성을 위한 청원’이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4일 현재 6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청원에 참여했다.
충격에 빠진 의료계는 응급실뿐 아니라 진료실, 입원실 등 모든 진료 현장에서 의료진의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안전한 진료 환경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의료진만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다”라며 “병원 내 폭행은 다른 환자의 진료권까지 빼앗는 만큼 의료기관 내 모든 공간에서 의료진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 의료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사협회는 26개 전문학회와 대한개원의협회 등 의료계 단체들과 함께 종합 대책을 세울 계획이다.
○ “강제 입원 금지한 정신보건법이 문제”
병원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보안을 강화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4일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 배치된 보안요원을 기존 1명에서 2명으로 늘렸다. 전체 보안요원 190명 중 환자 난동이나 폭행 우려가 큰 응급실 근무자 등 11명을 ‘폴리스’로 전환했다. 이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응할 수 있도록 방검조끼를 입고 삼단봉과 전기충격기 등 진압장비를 소지하고 있다. 삼성서울, 연세세브란스, 서울아산 등 주요 병원도 검문탐색기 설치, 보안인력 확충 등 보안 강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를 제대로 관리하거나 치료하지 못한 데 있다. 한 정신과 개원의는 “가해자가 퇴원한 뒤 1년간 외래치료를 받지 않고 지내다가 갑자기 증상이 악화돼 참변이 일어났다”며 “이 사건은 지난해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감안해 함부로 환자를 강제로 입원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 정신보건법을 시행하면서 생긴 문제다. 정신질환자의 강제 입원을 힘들게 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퇴원을 추진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입원과 퇴원의 경계선상에 있는 환자들은 정신질환으로 판단력이 떨어지는 데다 자신의 병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대개 외래치료를 거부한다. 결국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가 증상이 상당히 악화된 후에야 의료기관을 다시 찾는 것이다.
배재호 연세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환자 본인이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상태에서 가족들이 강제로 병원에 데려오기는 상당히 어렵다”며 “환자가 의무적으로 치료를 받도록 하는 ‘외래치료 명령제’가 있지만 현재 유명무실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외래치료 명령제는 퇴원 시 환자나 보호자가 동의해야 보건소에 등록이 가능하고 등록돼 있더라도 환자가 자의적으로 치료를 중단하면 환자에게 치료를 강제할 수 없는 맹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