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여행 전문기자의 休]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
막강한 막부군대를 기헤이타이 평민군대로 맞서 싸워 이긴 조슈번의 풍운아 다카스키 신사쿠(하기 시내). 이 조슈전쟁으로 260여 년 막부체제는 종식됐고 그 주역인 조슈번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게 됐다.
메이지 유신 150주년이던 지난 한 해, 일본의 거양은 전국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의 칼날을 시퍼렇게 세워 무엇이든 벨 준비를 갖추던 시절. 그 시작은 1853년 도쿄만에 출현한 흑선(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이었다. 외세로 촉발된 대내외 환난에 막부는 흔들렸고 ‘대양이’(大攘夷·우세한 서양의 실력을 배워 그 기술로 나라를 넘보는 서양을 제압하자는 전략) 개국론으로 무장한 세력은 265년 막부 체제를 몰아내고 새 세상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엄청난 지식과 기술. 그들은 그걸 조선의 국권과 영토 침탈에 쏟아부었다.
쇼인 동상. 미국 흑선을 주시하는 모습이다.
혼슈와 규슈 두 큰 섬 사이는 650m(간몬 해협). 거길 간몬대교가 잇는데 혼슈 최남단 시모노세키(下關·야마구치현)와 규슈 최북단 모지(門司·후쿠오카현)다. 시모노세키는 부산항 왕복 부관페리의 출항지. 복어로 이름난 곳이다. 그런데 그 복어는 여기 것이 아니다. 일본 전국서 온다. 여기서야 가장 좋은 값을 받아서다. 그 배경, 여기가 세토나이카이 해운의 관문이라서다. 히로시마 고베 오사카(세토우치), 더 나아가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까지 이어지는 뱃길 출발지다.
당시 요정이던 여긴 ‘조형의 규범이 되는 건물’이라 문화재가 됐다. 안에는 당시 회의장이 그대로 전시 중. 그런데 ‘청일강화조약은…조선 독립의 확인이 약속됐다’는 문구가 거슬렸다. 그건 미필적 고의의 오해 도발 문구다. 그게 조선 강점에 앞서 청나라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악의적 조처란 걸 모르는 이에겐 ‘평화협정(Peace Treaty)’이란 이름 아래 일본이 조선에 베푼 시혜로 해석될 수밖에 없어서다.
하기(萩)는 에도 시대 조슈번의 성도(城都). 삼면은 산, 나머지도 바다(동해)에 에워싸인 삼각주다. 이런 조슈엔 독특한 정서가 있다. 막부를 향한 울분이다. 배경은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동서로 재편된 세력이 천하통일을 두고 벌인 결전이다. 서군 수장엔 혼슈 남단 5개현을 영지로 가졌던 막강 조슈의 다이묘(영주) 모리 데루모토가 정해졌다. 하지만 그에겐 막부 수장의 뜻이 없었다. 그래서 소수만 출병시키고 자신은 오사카에 머물렀다. 승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몫. 패장 모리가(家)는 영지 상당분을 몰수당하고 하기로 쫓겨났다. 막부에 대한 증오심은 이렇게 시작됐고 절치부심은 260여 년을 이어갔다.
메이지 유신의 심벌 ‘조슈 파이브(Chosyu Five)’. 1853년에 막부 몰래 영국 유학을 결행한 조슈의 10대 5명을 말한다. 이건 영국 유학 당시 사진. 가운데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노우에 마사루,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겐스케. 이 중엔 하기 출신만 세 명.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그리고 이노우에 마사루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반년 후 귀국했다. 양이가 아니라 개국이 필요하단 걸 알리기 위해. 나머지 셋은 최장 5년을 머물며 철도, 조폐, 조선 등 산업기술을 배웠다. 일본 철도와 조선소, 조폐창(일본 화폐 발행)이 모두 이들에 의해 도입됐다. 야마구치대 정문 옆엔 조슈 파이브 헌창비가 있다. 2006년엔 영화로도 제작됐다.
시모노세키에서 하기까지는 도로로 90km. 동해로 흘러나가는 아부강 두 물줄기가 형성시킨 삼각주 평야의 하기는 한적한 어촌 형국. 육지는 동남북 세 방향으로 산에 갇혔고 트인 서쪽은 동해. 사방이 물과 산에 막힌 터라 도저히 성도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패장에 대한 근신처벌로는 완벽하겠지만. 히로시마를 떠나게 될 때 모리가는 내륙(야마가타시)을 요청했다. 하지만 막부의 결정은 하기. 막부를 향한 원한이 사무칠 만도 하다. 쇼카손주쿠는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거긴 쇼인신사 경내로 성역화된 상태. 그가 일본 군국주의 화신이란 사실을 안다면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신사 대신 여길 찾은 이유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도 세계유산에 등재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하기의 산업화 초기 유산군)이었다. 숙생들이 살던 하기성 아랫마을과 더불어.
쇼카손주쿠. 메이지유신 주역의 산실이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의 롤 모델이 돼서다. 그 고리는 1863년 시모노세키 전쟁(조슈번의 서양 함대 대포 공격) 이듬해 열린 영국과 강화협상. 영국 유학 중 급거 귀국한 이토는 막부 대표였던 그의 통역을 맡았다. 그의 인물됨에 감화된 이토는 기헤이타이에 참가했고 조슈전쟁 참전을 통해 메이지 정부에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또 한 사람의 조선 공적(公敵)이 탄생했다. 전쟁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기헤이타이 포대장 미우라 고로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경복궁에 불을 지른 조선공사다.
쇼카손주쿠 숙생의 일본 군국주의 기여에선 기헤이타이 총독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메이지 정부의 징병제(1873년) 도입 등 군사체제 근대화에 앞장선 인물(제국육군원수·내각총리 2회 역임). 그게 일본 육군의 모체가 돼 ‘일본 군국주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것만으로도 쇼카손주쿠가 개화기 일본에 공헌한 바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된다. 내각에 진출한 이토 히로부미는 학교령으로 교육개혁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징병제로 군국주의 체제를, 다카스키 신사쿠는 기헤이타이를 통한 막부 타도로 메이지 유신 길을 틔웠다. 하기는 그 모든 것의 산실. 쇼인의 생가 터와 무덤·동상, 다카스키 신사쿠 집터와 동상, 이토 히로부미의 집이 쇼인 신사 주변에 산재한다.
료칸 간지마벳소에서 바라본 하기 운하의 야경.
산큐패스(SunQ Pass): 북부 규슈 3일권(7000엔), 규슈 전역 3, 4일권(1만, 1만4000엔)은 시모노세키를 포함해 야마구치현 일부 지역 노선버스에도 통용된다. 모지코↔가라토 터미널 보트 탑승도 물론. 산큐패스를 가장 저렴하게 파는 곳은 디스커버리 규슈. 패스 이용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규슈타비.
하기(萩): 도시가 크지 않고 한적해 자전거를 빌려 여유 만만하게 돌아보기를 권한다. 히가시하기역 앞에 대여점. 시간당 200∼350엔(하루 1000엔). 순환루트 마루버스(거리 무관 1회 100엔)가 30분 간격으로 운행(동·서 루트). 하루 무제한 이용권은 500엔. ◇콤비네이션 티켓: 조카마치(城下町) 이토 히로부미 저택 등 유료 입장 9곳 통합이용권(310엔). 구입은 매표소에서. 쇼인신사(쇼카손주쿠), 다카스키 신사쿠 집터(동상), 쇼인 무덤과 생가 터(동상)는 무료 입장. 저팬가이드닷컴(영어)
간지마벳소(鷹島別邸): 지류가 아부강에 유입되는 합수 지점의 수변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고급 료칸(하기온천·Hagi Hakkei Ganjima Besso). 모든 객실에 로텐부로 설치. 아부강, 운하 조망 객실 선택. 히가시하기역에서 도보 8분. 야마구치현 하기시 진토 3092.
하기시(야마구치현)=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