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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답방없는 ‘문재인 균형자론’이 공허한 까닭

입력 | 2019-01-05 19:51:00


신년 첫 행사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세력균형론과 균형자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관류할 남북관계의 관전 포인트다. 세력균형을 잡으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균형자가 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쟁이 한반도 운명을 결정한다. 

김 위원장의 세력균형론은 간단하다. 최저 목표는 미국과 한국의 침략을 받지 않고 시간을 버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침략을 우려하는 이유는 6차 핵실험, 2017년 화성-15형 시험발사로 핵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완료했기 때문이다.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 이외의 나라가 핵과 ICBM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북한은 조악한 인공위성을 올리는 발사체만 쏘아왔다. 인공위성을 올리는 사업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원거리 적’이 있어 바로 ICBM급 미사일 시험발사를 해 성공했다. 북한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제외하고 핵무기와 ICBM을 동시에 개발한 유일한 나라다. 

유엔을 창설한 미국은 그 후 핵무장은 안보리 상임이사국만 한다는 회원국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어길 경우 가할 처벌은 없다. 단, 약속을 어긴 나라를 제재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아지면 다국적군을 만들어 그 나라를 칠 수 있다. 유엔 헌장은 타국을 침략한 나라를 상대로만 전쟁을 할 수 있다고 해놓았다. 대형테러는 침략과 같은 급으로 여겨 유엔은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를 지원한 아프가니스탄을 치는 반(反)테러 전쟁을 승인했다. 미국은 이 전쟁 상대국에 반미를 외쳐온 이라크를 넣고자 했다. 그러나 이라크가 테러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부족하자 이라크의 WMD(대량살상무기) 개발 혐의를 추가했다. 

하지만 유엔은 이라크전을 위한 다국적군 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라크전을 감행해 승리하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생포해 처형했다. WMD 흔적을 찾아내지 못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미국을 처벌할 나라는 없었으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핵개발을 완료한 북한은 이라크 꼴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따라서 김 위원장의 1차 목표는 군사적 제재 여론이 형성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상대가 먼저 핵을 사용하지 않으면 북한도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북한 조선노동당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조선중앙TV]

여기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추가한다. 미국이 공격하면 대한민국을 핵공격하겠다고 협박해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미국의 공격을 막게 하는 것이다. 한반도가 한국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을 극구 피하고자 하는 중국도 협박해 “침략전쟁을 하지 말라”며 미국을 막아서게 한다. 이를 위해 중국이 만든 전략이 쌍중단과 쌍궤병행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보겠다며 나선 이가 문재인 대통령이다. 북한은 미국이 이라크전을 감행한 것처럼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 지휘부 시설, 지도자가 머무는 시설을 원샷, 원킬로 날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유엔 회원국인 이상 북한도 종국에는 핵무장을 포기해야 한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은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 해제를 의미하는 상응 조치를 조건으로 비핵화를 거듭 약속하고 있다. 미국 측에 공격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비핵화 조건을 찾는 협상을 할 수 있다. 이 협상은 군사력이 약한 나라가 세력균형을 잡을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되니 북한은 마다할 이유가 적다. 북한은 ‘치열하게 다투되 판은 깨지 않는 것’(투이불파·鬪而不破)의 달인이다. 

투이불파의 회담을 성사하고자 김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를 활용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북한이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한국의 염려를 역이용해 북한 대표팀과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등을 보내 올림픽을 함께 하게 했다. 이어 판문점 회담과 북·미 싱가포르 회담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급선회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놀랐다. 오랫동안 북한 정보를 분석해온 A씨는 “미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벌이고 남중국해에서 군사 대치 중인데, 북한이 미국으로 기울면 크게 불리해지니 중국은 김 위원장을 불러들여 급히 당근을 던졌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로 가기 전 시 주석을 두 번 만난 김 위원장은 다녀온 후 다시 만나 다짐을 받았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기대를 넘어서는 소득이었다. 중국의 개입으로 김 위원장은 좀 더 확실하게 미국과 세력균형을 잡게 됐다. 따라서 평양까지 온 문 대통령에게 연내 답방을 약속하지 않는 배짱을 부렸다. 

문재인 정부는 북·미가 북한 비핵화 조건을 합의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북핵 문제는 남북한 문제이기도 하니 한국도 참여해야 한다. 양자회담에 참여하는 제3자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 불리한 쪽을 거들어 세력균형을 잡을 수도 있고, 룰을 관리하는 심판관 역할도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양쪽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제3자는 존재감을 잃는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국교를 맺는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성공시켜 중동전쟁을 종식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싸움을 멈추게 한 오슬로 협상에도 성공했다. 미국도 강력한 힘이 있었기에 균형자 역할에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영국이나 미국 같은 파워를 갖고 있느냐가 문제다. 북한이 핵위협을 가했을 때 공포에 떠는 나라나 지도자가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고 하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백두칭송위원회에 반대하며 결성된 백두청산위원회. [뉴시스]

문재인 정부가 김 위원장 답방을 위해 노력할 때 백두칭송위원회가 만들어지자, 보수단체들은 김 위원장 답방 저지 투쟁에 들어갔다. 남남(南南)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허용하면 문재인 정부는 균형자 역할을 하기 힘들어진다. 문재인 정부는 남남 갈등도 제압해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김 위원장은 우회적으로 답방 조건으로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 해제를 내밀었는데, 이는 방어적으로 해온 세력균형을 공세적으로 바꾸겠다는 신호다. 북한은 미국이 북한을 치기 어렵다고 보는 것 같다. 이유는 미국 경제가 나빠질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무기 목록을 일부분 제시해 일부 비핵화를 하고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를 해제하려 들 것이다. 

현재 북·미 협상은 끊긴 상태다. 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김 위원장의 답방이 할 수 있다. A씨는 “미·중이 3개월간 무역전쟁을 중단하기로 한 것은 양측 모두 힘들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남북관계에 돌파구가 생겨야 양국 갈등도 해소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때문에 중국 역시 김 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하고 시 주석의 방북도 추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져 북한 비핵화와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 해제가 교환된다면 미·중, 남북은 모두 만족할 수 있다. 북한 비핵화 정도와 유엔 안보리 제재 해제 정도에 따라 덜 만족하는 나라는 나오겠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향은 이것뿐이다. 물론 이 합의와 관련해 북한이 더 많은 핵무기를 숨겨놓았다며 ‘무늬만 비핵화’라는 지적도 나오겠지만, 이는 지지율 상승을 의식해야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막아낼 수 있다. 

미·중이 무역전쟁을 잠정 중단하기로 한 2월 말까지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답방을 성사시킨다면 그는 균형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로 미뤄지거나 무산된다면 이를 상실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71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