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첫 행사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김 위원장의 세력균형론은 간단하다. 최저 목표는 미국과 한국의 침략을 받지 않고 시간을 버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침략을 우려하는 이유는 6차 핵실험, 2017년 화성-15형 시험발사로 핵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완료했기 때문이다.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 이외의 나라가 핵과 ICBM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북한은 조악한 인공위성을 올리는 발사체만 쏘아왔다. 인공위성을 올리는 사업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원거리 적’이 있어 바로 ICBM급 미사일 시험발사를 해 성공했다. 북한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제외하고 핵무기와 ICBM을 동시에 개발한 유일한 나라다.
하지만 유엔은 이라크전을 위한 다국적군 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라크전을 감행해 승리하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생포해 처형했다. WMD 흔적을 찾아내지 못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미국을 처벌할 나라는 없었으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핵개발을 완료한 북한은 이라크 꼴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따라서 김 위원장의 1차 목표는 군사적 제재 여론이 형성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상대가 먼저 핵을 사용하지 않으면 북한도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북한 조선노동당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조선중앙TV]
이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보겠다며 나선 이가 문재인 대통령이다. 북한은 미국이 이라크전을 감행한 것처럼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 지휘부 시설, 지도자가 머무는 시설을 원샷, 원킬로 날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유엔 회원국인 이상 북한도 종국에는 핵무장을 포기해야 한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은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 해제를 의미하는 상응 조치를 조건으로 비핵화를 거듭 약속하고 있다. 미국 측에 공격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비핵화 조건을 찾는 협상을 할 수 있다. 이 협상은 군사력이 약한 나라가 세력균형을 잡을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되니 북한은 마다할 이유가 적다. 북한은 ‘치열하게 다투되 판은 깨지 않는 것’(투이불파·鬪而不破)의 달인이다.
이러한 급선회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놀랐다. 오랫동안 북한 정보를 분석해온 A씨는 “미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벌이고 남중국해에서 군사 대치 중인데, 북한이 미국으로 기울면 크게 불리해지니 중국은 김 위원장을 불러들여 급히 당근을 던졌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로 가기 전 시 주석을 두 번 만난 김 위원장은 다녀온 후 다시 만나 다짐을 받았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기대를 넘어서는 소득이었다. 중국의 개입으로 김 위원장은 좀 더 확실하게 미국과 세력균형을 잡게 됐다. 따라서 평양까지 온 문 대통령에게 연내 답방을 약속하지 않는 배짱을 부렸다.
문재인 정부는 북·미가 북한 비핵화 조건을 합의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북핵 문제는 남북한 문제이기도 하니 한국도 참여해야 한다. 양자회담에 참여하는 제3자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 불리한 쪽을 거들어 세력균형을 잡을 수도 있고, 룰을 관리하는 심판관 역할도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양쪽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제3자는 존재감을 잃는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국교를 맺는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성공시켜 중동전쟁을 종식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싸움을 멈추게 한 오슬로 협상에도 성공했다. 미국도 강력한 힘이 있었기에 균형자 역할에 성공한 것이다.
백두칭송위원회에 반대하며 결성된 백두청산위원회. [뉴시스]
김 위원장은 우회적으로 답방 조건으로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 해제를 내밀었는데, 이는 방어적으로 해온 세력균형을 공세적으로 바꾸겠다는 신호다. 북한은 미국이 북한을 치기 어렵다고 보는 것 같다. 이유는 미국 경제가 나빠질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무기 목록을 일부분 제시해 일부 비핵화를 하고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를 해제하려 들 것이다.
현재 북·미 협상은 끊긴 상태다. 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김 위원장의 답방이 할 수 있다. A씨는 “미·중이 3개월간 무역전쟁을 중단하기로 한 것은 양측 모두 힘들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남북관계에 돌파구가 생겨야 양국 갈등도 해소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때문에 중국 역시 김 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하고 시 주석의 방북도 추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져 북한 비핵화와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 해제가 교환된다면 미·중, 남북은 모두 만족할 수 있다. 북한 비핵화 정도와 유엔 안보리 제재 해제 정도에 따라 덜 만족하는 나라는 나오겠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향은 이것뿐이다. 물론 이 합의와 관련해 북한이 더 많은 핵무기를 숨겨놓았다며 ‘무늬만 비핵화’라는 지적도 나오겠지만, 이는 지지율 상승을 의식해야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막아낼 수 있다.
미·중이 무역전쟁을 잠정 중단하기로 한 2월 말까지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답방을 성사시킨다면 그는 균형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로 미뤄지거나 무산된다면 이를 상실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71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