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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영식]조성길이 한국행을 포기한 까닭은?

입력 | 2019-01-08 03:00:00


김영식 국제부장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인생은 끝이 났네요. 더 이상 로마(에서의 삶과는) 같지 않겠네요.”

평양행을 앞둔 조성길 대사대리를 마지막으로 만난 안토니오 라치 전 이탈리아 상원의원은 이런 농담을 건넸다고 했다.

“네, 압니다.”

조성길의 대답은 짧고 명확했다. 하지만 속으로 품은 탈출 계획 때문에 그의 심경은 불안하고 복잡했을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의장국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를 강력하게 실천했던 이탈리아. 그런 나라에서 북한 대사관의 상무관으로 일한다는 것은 벽과 대화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문정남 전임 대사가 핵실험을 이유로 쫓겨난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초라한 실적을 안고 평양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0점 시험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학생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가 2016년 말 한국에 입국한 직후 밝혔듯이, 해외 주재 북한 외교관들은 인터넷 등으로 한국 소식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다. 조성길도 망명을 결심한 순간부터는 친분이 있던 태 전 공사의 방송 출연, 저서 출판 등 행적에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랬을 그가 한국 대신 미국행을 원한다는 대목에선 생각해봐야 할 일이 많아진다.

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의 실상이 그에게 불안감을 줬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공영방송인 KBS에선 ‘김정은 위인맞이 환영단장’의 찬양 인터뷰가 나오고, ‘백두칭송위원회’ 소속 대학생들이 김정은의 서울 방문을 환영하는 연설대회를 여는 게 현실이다. 남북의 만남을 긍정적으로 지지한 것으로만 평가하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 그를 주저하게 한 것은 아닐까?

태 전 공사는 조성길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여서 ‘백두수호대’나 ‘태영호 체포결사’대 같은 극좌적인 조직들도 있지만 극소수”라며 “한반도의 평화통일,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는 조직들이 수십 개”라고 표현했다. 아마도 서울의 바뀐 기류를 두려워할 친구의 심정을 즉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이탈리아 언론마저 “한국은 수십 년간 탈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망명지였으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을 기다리는 한국 정부가 북한 체제를 배신한 그를 환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어찌됐든 조성길의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정은 끝날 것이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두려움도 있겠지만 이제라도 가능하다면, 조 대사대리가 새로운 인생을 준비할 곳은 미국이 아닌 한국이었으면 한다. 남북 화해 움직임의 한편으로 ‘새로운 길’로 나설 수 있다고 위협하는 이중 접근이 체질화된 북한을 우리는 상대해야 한다. 태 전 공사는 조성길에게 한국행이 의무라고 했다. 덧붙여 남북 분단의 고통을 끝내고 진정 ‘새로운 길’을 함께 만들 소중한 자원으로서 기여하는 것도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 하고 싶다.

북-미 정상회담과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고대하던 새해 벽두에 터진 북한 외교관 망명 타진 소식에 외교가에선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조성길이 제3국으로 도피했다가 이탈리아에 복귀했다는 둥 각종 미확인 첩보까지 쏟아지는 정보 전쟁도 치열하다. 그런데도 불필요한 국내 파트를 정리하고 해외 활동 등 본연의 업무를 다하겠다던 국정원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얼마 전 중동지역에 부임한 한 국정원 직원이 “주 업무가 대북정보 수집에서 국익 사업 및 관련 정보 수집으로 변했다”고 얘기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어디 특정 공관 한 곳에서만 이러고 있겠나.
 
김영식 국제부장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