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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동정민]‘불량 독재국가’ 딱지… 북한 외교관들의 비애

입력 | 2019-01-09 03:00:00


동정민 파리 특파원

“민족의 한 구성원이며 북한 외교관이었던 나나 자네에게 한국에 오는 건 의무일세.”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가 5일 잠적한 조성길 주이탈리아 북한대사관 대사대리에게 쓴 진심 어린 애틋한 편지에서는 ‘북한 외교관 출신’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는 2014년 영국 공사 시절 런던 서부 사우스일링의 한 미용실을 찾았다. 당시 김정은의 독특한 헤어스타일 사진에 ‘불쾌한 날엔(BAD HAIR DAY)’이라는 문구를 달아 할인 행사 포스터를 만든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 존엄 모독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2016년 8월, 태 전 공사 망명 직후 취재차 주영국 북한대사관 동네를 찾은 일이 있다. 주민들은 이 에피소드를 황당한 웃음 소재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충성심이었을지 모르나 태 전 공사가 돌이켜보더라도 자랑스러운 북한 외교관이 하기에는 멋쩍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번 망명 시도 취재차 방문했던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유럽 곳곳에서 근무하던 북한 외교관들의 행적을 취재할 때마다 그들이 참 안쓰럽다는 느낌이 컸다. 어느 나라나 수도에는 ‘외교가(街)’가 있다. 외교의 기본은 주재국 혹은 다른 나라 외교관들과의 사교와 네트워킹이어서 수도의 특정 지역에 주요국 공관이 밀집해 있다. 그렇게 서로 편하게 초대해 식사를 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신뢰를 쌓는다.

그러나 옛 사회주의권 동유럽 국가 외 국가의 북한대사관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은 집값 때문이다. 국경일에 친북 인사들을 초대하는 것 말고는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다. 관사를 얻을 비용마저 부족한 북한 외교관들은 유럽 어디서나 대사관 위층에서 같이 생활하곤 한다. 이 때문에 대사관 창문은 외부에서 볼 수 없게 늘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다. “하필 우리 동네에 불량 독재국가 대사관이 들어와 있나”라는 곱지 않은 주민들의 시선도 견뎌야 한다.

이동의 자유가 없는 북한은 해외에서 영사 업무라 할 일도 없는 셈이다. 교민도, 유학생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탈리아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건축 공부를 하러 나온 엘리트 유학생들이 매주 일요일 북한대사관에서 사상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이젠 대부분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재국 정부 외교 당국과도 좋은 일로 만날 일이 없다. 2017년까진 핵실험 때마다 주재국 외교부에 불려가 혼이 났다. ‘불량 독재국가’ 딱지가 붙은 외교관들은 활동에 주눅이 들었다.

대사관 생활은 어떤가. ‘빽’이 없는 한 북한에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나온다. 가족을 데리고 나와도 여행 한번 편하게 다니기 힘들다. 공관 내에는 늘 감시하는 누군가가 있다. 장을 볼 때도 다 함께 승합차를 이용해야 한다.

현장에서 만난 주재국 언론인이나 외교관들은 북한 외교관들이 외국어 능력도 우수하고 업무 처리도 스마트하게 한다고 말한다. 자존심도 강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드러내지도 않고, 경제적 지원도 선뜻 받지 않았다는 증언들도 있었다.

조성길도, 태영호도 임기를 마치고 본국 복귀를 앞두고 자식과 함께 망명을 결심했다. 엘리트인 이들은 북한에 돌아가면 주재국 외교관으로 근무하는 것보다는 생활수준이 더 나아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자유와 번영을 맛본 이들에겐 내 자식만큼은 ‘정상국가’에서 살게 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더 컸을 것이다. 그게 망명의 도화선이 아니었을까. 목숨 걸고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