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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B’ 없는 운동선수들… 한국 스포츠계는 ‘미투’ 사각지대

입력 | 2019-01-09 17:23:00


법정 출석하는 조재범 전 코치. 사진=뉴시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한국체대)의 성폭행 피해 폭로가 ‘미투운동’의 사각지대로 여겨진 한국 스포츠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동안 국내 스포츠 현장에서는 성폭력으로 고통을 받았다는 목소리가 간간이 나오긴 했어도 연쇄적인 ‘미투 운동’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정치권과 문화계 전반으로 미투 운동이 확산된 것과 대조적이다.

한 대학 교수는 “올 것이 온건지도 모른다. 한국 스포츠의 구조적인 한계 속에서 성폭력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나 드러나지 않았을 것일수도 있다”고 말했다.

운동선수들은 학창 시절부터 운동 하나에 인생을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동 말고는 다른 진로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진학이나 취업을 결정짓는 성적이나 기록을 좌지우지하는 지도자의 횡포에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때문에 더욱 ‘윗사람’들의 눈 밖에 날 언행을 자제하게 된다.

최준서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운동 외에도 ‘플랜 B’가 있다면 미투 운동이 확산됐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며 “처음부터 퇴로가 막혀있는 상황에서 선수들이 지도자를 상대로 싸우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대한체육회 2017년 조사를 보면 국가대표 경력이 있는 은퇴선수 네 명 중 한 명은 직업을 갖지 못한 상황이다. 취업자 중에서도 37%는 월 200만 원 이하의 급여를 받고 일하고 있다.

반면 이 같은 폭로나 고소·고발에 가해자들이 보복하기는 어렵지 않다. 출전 기회를 주지 않거나 경기력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방법이 주로 쓰인다. 강유원 세종대 체육학과 교수는 “국가대표 지도자나 체육단체 임원쯤 되면 다른 선수나 심판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면서 “체조, 피겨 등은 심판을 회유해 낮은 점수를 주는 방법이, 기록경기는 다른 선수를 통해 경기력을 낮추거나 방해하는 방법이 주로 쓰인다”고 말했다.

성폭력을 가한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스포츠계에 계속 발을 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제보는 더 어려워진다.

실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쇼트트랙 실업팀 감독 A 씨(54)는 선수 성추행 혐의가 인정돼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지만 대한체육회 선수위원회의 영구 제명 징계는 판결 이후 자격정지 3년으로 줄어들었다. A 씨가 “공개된 장소에서 교육 중 발생한 일”이라 해명했고 이를 선수위원회 위원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체육단체 간부의 경우 중앙단체와 지역단체를 오가는 방법으로 계속해서 자리를 보존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현직 선수들은 피해자들이 높은 확률로 가해자와 다시 마주치게 된다고 증언한다. 국내 대학에 소속된 한 현역 복싱선수는 “지도자들은 협회 수뇌부와 선수들의 학부모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피해를 당했더라도 선수로 계속 뛰는 한 반드시 마주치게 되어 있다”며 “선수 인생을 계속 할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 용기를 내겠나”라고 토로했다.

연세대 농구부 감독 출신인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은 “운동 선수에게 다양한 직업 교육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운동에만 매달리다 어린 나이에 은퇴해 마땅한 직업을 찾기 힘든 게 한국 학원 스포츠의 실정이다. 몇 년 전부터 공부하는 운동부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운동에만 집중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는 게 현장 지도자의 목소리다.

해외에서는 스포츠계의 성폭력 폭로가 사회 전반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다. 래리 나사르 전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가 어린 여자 선수들 156명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사건은 미국 전역을 분노하게 했다. 법원은 징역 175년을 선고했고 제대로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한 체조협회는 미국 올림픽위원회에서 협회 자격을 박탈당한 후 막대한 보상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파산했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이원주기자 takeof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