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체육회 속기록에 드러난 스포츠계 성폭력 부실징계 실태
“내 동생이, 내 오빠가 그 지도자일 수도 있다는 것도 한번 생각을 해주십시오.”(C 위원)
“그런 것을 영구제명해 버리면 선수 지도 부분에서 굉장히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D 위원)
2016년 2월 2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회관 13층 회의실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선수위원회 속기록의 일부다. 이날 대한체육회 자체 징계의 최종 심사기구였던 선수위원회는 쇼트트랙 실업팀 감독 A 씨에 대한 영구제명 징계를 재심의했다.
A 씨는 체육계 징계와 별도로 진행된 법원 판결에서 선수 성추행 혐의가 인정돼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뒤 2심에서 벌금 2000만 원에 40시간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처분이 내려졌다.
A 씨가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음에도 체육계 자체 징계에서는 영구제명 징계가 자격정지 3년으로 줄어들었다. 이날 체육계 1차 심의에 관여했던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는 자체 규정상 해당 사항은 영구제명에 해당한다고 답변했다. 이에 이날 참석한 다른 위원들은 규정을 재해석해 해당 사안이 영구제명에 해당할 정도는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갔다.
하지만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 규정 제29호에는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의 경우 이미 한 번 징계가 내려지면 어떠한 경우에도 징계 수위를 감경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위원회가 규정까지 무시해 가면서 ‘제 식구 감싸기’에 나선 것이다.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스타 심석희를 비롯해 국내 스포츠 현장에서 성폭력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이처럼 허술한 시스템 탓이라는 지적이다. 성폭력 사태가 불거질 때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등 관련 기관들은 무관용, 일벌백계, 원 스트라이크 아웃 등 표현을 바꿔가며 재발 방지를 외쳤지만 실효는 적었다.
대한체육회는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 통합 시대를 맞아 2016년 3월 선수위원회의 징계 관련 업무를 신설 스포츠공정위원회로 이관했다. 하지만 성폭력 등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많다. 한 경기단체 전 회장은 “법조인, 학자 등으로 이뤄진 공정위원회 위원들의 전문성이 떨어져 보인다. 외풍에 따라 결정이 내려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성폭력 등의 사건이 보고되면 우선 시도체육회와 경기단체에서 1심을 한 뒤 징계에 대한 이의가 발생하면 공정위원회 2심을 통해 징계가 확정된다. 하지만 시도체육회나 경기단체는 같은 종목 선후배들로 조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제 식구 감싸기 식으로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단일화되지 않고 스포츠 관련 기관마다 여러 곳에 존재하는 신고센터도 선수들의 제보나 신고를 힘들게 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스포츠비리신고센터를, 대한체육회에서는 클린스포츠센터를 각각 운영해 일원화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또 비리 내용을 접수하는 이들 기구의 구성원들도 체육계 인사들인 경우가 많다. 중립성을 확보한 인사들로 구성된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 등을 전담할 준사법기관의 신설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김종석 kjs0123@donga.com·이원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