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윤정희 ‘절친커플’ 러브스토리
파리=동정민특파원 ditto@donga.com
지난 5일 동아일보에서 새해를 맞아 새로 시작한 ‘절친 커플’ 시리즈 1회로 보도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영화배우 윤정희 부부의 이야기는 큰 화제가 됐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난 후 45년 동안 친구이자 부부, 그리고 파트너로 함께 살아가는 러브 스토리가 아름다웠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들 부부와는 4차례, 모두 12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평생 둘이 같이 이렇게 오래 인터뷰한 건 처음”이라고 말한 그들은 인터뷰 동안 여러 차례 “당신 정말 그랬어? 나도 오늘 처음 들었네”라고 놀라했습니다.
부부끼리도 미처 알지 못했던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사랑과 인생 이야기를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전해드립니다.
파리=동정민특파원 ditto@donga.com
지난달 25일, 백건우 윤정희 부부와 함께 파리 소르본 대학가 근처 뒷골목에 들어섰다. 중국 태국 베트남 요리를 모두 다루는 허름한 아시아 식당이 저 멀리 눈에 띄었다. 광명주가(‘光明酒家’).
“간판도 45년 전 그대로네”
백건우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윤정희는 문에 붙어 있는 메뉴 그림을 보고 “이거 맞네”라며 반가워했다.
1974년 어느 같은 날 백건우는 조각가 문신 씨와 함께 이 식당에 들어섰고, 중국인 친구와 식사를 마친 윤정희는 나오는 길이었다. 식당 문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반가움과 놀라움 속에 말을 잃었다.
“(윤) 우리가 만난 그 날 기억이 나요. 파리 소르본대에서 영화 공부를 할 때인데 영화 분석 과목 숙제를 하기 위해 근처 영화관에서 잉그리드 버그만 회고전을 보고 밥 먹으러 왔죠. 불과 몇 초만 엇갈렸어도 우리 둘은 못 만났을 거에요. 이런 우연이 없죠. 저 사람이 파리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두 사람은 3년 전 결혼 40주년에도 이 곳을 찾아 국수를 먹었다. 백건우는 “화려한 곳에 갈 수도 있었겠지만 추억을 찾고 싶었죠. 근데 맛이 예전만 못하더라구요”하며 웃었다.
“식당에서 만난 이후 우리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백건우의 말처럼 두 사람은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불같은 사랑에 빠진 것은 2년 전 아쉬운 헤어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72년 9월, 백건우는 뮌헨올림픽 문화 축제 때 열린 윤이상 작곡가의 오페라 ‘심청’ 초연을 관람하러 공연장에 들어갔다. 한 여자가 다가와 자기 자리를 물었다. 백건우 바로 앞자리였다. 백건우와 윤정희의 첫 만남이다. 15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백건우는 최고의 여배우 윤정희의 존재를 몰랐고, 미국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 유망주였던 백건우를 윤정희도 몰랐다.
백건우는 그 순간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아무 조건도 없이 남과 여 그 자체로 만났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백건우, 한국에 있던 윤정희가 뮌헨까지 왜 갔습니까.
“(윤) 신상옥 감독과 함께 찍은 영화 ‘효녀 심청’이 뮌헨에서 상영됐어요. 워낙 영화 촬영이 바빴을 때라 독일까지 가기 힘들었는데 거장 신 감독 ‘빽’으로 갈 수 있었죠.”
오페라 심청을 보러 온 한국 청년들은 다음날 영화도 같이 보고, 맥주도 함께 마셨다. 맥주 파티 동안 한 남성이 꽃을 팔러 다가왔다. 유럽은 아직도 식당 안으로 꽃을 팔러 다가오는 상인들이 많다. 다들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백건우는 꽃을 사서 말없이 윤정희에게 건넸다.
“(백) 빨간 장미꽃 한송이였어요. 아무 말이 필요 없었어요. 꽃이 다 이야기하는데.”
“(윤) 은근히 서로 마음에 있었지.”
두 사람의 인연은 이어졌다. 뮌헨 일정이 끝나고 신상옥 감독은 백건우에게 파리 동행을 제안했다.
“(백) 신 감독이 ‘당신이 전에 파리에 가 본 적도 있으니 같이 가자’며 비행기표를 사 주셨어요. 셋이서 함께 샹젤리제 산책도 했고, 또 신 감독 없이 둘이서만 에펠탑도 올라갔죠.”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부부
두 사람은 ‘썸’을 탔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고백하진 못했다.
“(백) 서로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더 만남을 이어가기가 힘들다는 걸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었죠. 파리에서 헤어진 뒤 편지 한 두통이 오가긴 했지만 지금처럼 SNS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고, 그렇게 잊혀져갔죠.”
“(윤) 그러니 2년 뒤 만남이 얼마나 영화 같아요. 그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요.”
백건우는 1946년 5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누나가 한 명 있다.
5년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무작정 내려갔다. 백건우는 “피난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는데 영화 닥터지바고 딱 그거였어요. 기차타고 가는데 빼곡히 숨도 못 쉴 정도로 사람에 끼어가지고 중간에 몇 번씩 멈추면서 간 기억이 나요. 지붕위에도 사람이 앉아있었죠”
그렇게 연고도 없이 부산 동래온천에 자리 잡은 백건우 가족은 어머니가 무궁화 유치원을 열어 생계를 이어갔다.
-집에 피아노가 언제 생겼습니까.
“7살 반 때 어머니가 개인교습을 하려고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를 하나 샀어요. 다른 아이들 가르치시느라 나는 안 가르쳐주셨어요. 그래도 자연스레 피아노를 만질 수가 있었죠.피아노는 주로 아버지가 가르쳐주셨죠.”
-아버지도 피아노를 치셨나요?
“아버지는 독특하신 분이었어요. 다방면의 박사셨는데 학교에서 합창 지휘도 하고, 영어도 가르치고, 붓글씨도 유명했어요. 미군 부대에 그림도 그려주고 심지어 동네에서 사교 댄스도 가르쳤죠. 피아노는 치시지 못했지만 일본 유학시절 음악을 많이 들어 클래식에 대한 조예가 깊으셨죠.”
그러나 아버지의 교습법에 적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피아노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웠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듣는 음악 수준은 높고 교습법은 모르니까 수준에 안 맞는 어려운 곡을 치라고 강요했어요. 그래서 피아노를 즐길 수가 없었죠. 그 당시 피아니스트 선생에게 저를 맡겼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의 천재적인 소질은 빛나기 시작했다.
-독주회를 처음 한 게 몇 살 때인가요?
“9살 반이었죠. 부산에서 했는데 사실 지금 보면 엉터리였어요. 당시 스웨덴 병원 강당 같은 곳에서 독주회를 했어요. 5학년 때 서울로 이사와서는 서울시향 김생려 지휘자와 함께 피아노 협주곡도 했죠.”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부부
그는 남산초-장충초-배재중을 거쳐 한양공고에 들어간 백건우는 1학년 때 첫 해외 콩쿠르 참석 기회를 얻었다. 제1회 드미트리 미트로폴리스 콩쿠르. 국내 선발 과정을 거쳐 뽑힌 백건우는 막연하게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뉴욕 가는 데만 도쿄, 하와이, LA를 거쳐 며칠이 걸려야 하는 시대였다. 그 곳에서 운명적인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정희는 1944년 7월 30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장녀다. 아버지는 와세다대 법대를 나온 유학 엘리트 지식인으로 부산에서 신문기자를 했다. 동생 다섯 중 3명은 미국, 한 명은 한국에, 막내 여동생은 파리에서 살고 있다.
-그럼 유복하게 사셨겠네요.
“외할머니가 광주에서 큰 공장을 하셔서 부유했어요. 우리 집은 아주 돈 많은 부유한 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 유치원을 나왔으니 중산층 이상은 되죠. 학창시절 발레, 전통무용, 합창반을 꾸준히 했어요. 그게 큰 도움이 됐죠. 특히 기생 역할할 때 큰 도움이 됐어요. 부모님이 너무 자유로우신 분이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셨죠.”
-어린 시절 윤정희는 어떤 소녀였나요?
“그냥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늘 꿈속에 사는 조용한 학생이였어요. 제 남편은 지금도 나한테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해요. 지금도 꿈속에서 산다고.”
백건우가 끼어들었다.
“(백) 저 사람은 달나라에서 왔어요.”
“(윤) 나는 달은 좋아하지만 달나라에서는 안 살아”
“(백) 영화 ET를 보면 달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홈(home?집)’ ‘홈’ 하잖아요. 저 사람은 달만 보면 ‘달’ ‘달’ 그러면서 좋아하거든요.”
“(윤) 달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백) 달 볼 때마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달처럼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몰라요.”
그녀의 원래 꿈은 교수나 외교관이었다.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였다. 공부도 잘했다. 시험을 쳐서 지역 명문인 전남여중-고를 나왔다. 조선대에 들어갔다가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했고, 배우가 된 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석사를 마쳤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따러 영화의 본고장 파리로 향했다.
영화를 좋아했지만 영화배우가 될 생각은 안 했다. 그러다 1966년 영화 ‘청춘극장’ 오디션 공고가 떴다. 김내성 소설을 알았던 그는 영화에 끌렸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명동성당 주임 신부님께 달려갔다.
“영화배우를 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네가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배우가 된다면…”
연기를 배워본 적도 없는 그가 오디션을 위해 한강변에 섰다. 1200대 1의 경쟁, 주연 여배우는 그녀의 몫이었다.
< 2회는 두 사람의 결혼식과 신혼, 그리고 북한에 납치될 뻔 한 사건을 전합니다. >
파리=동정민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