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부르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합니까.”
2011년 여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인들과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국립공원 인근의 존 뮤어 트레일 코스를 걷고 있었다. 산세가 험한 오지여서 3주 코스의 산행 중에는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았다. 일주일마다 음식물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쉼터에서만 통화가 가능한데 첫 쉼터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돈인 김승규 전 국가정보원장이었다. 사돈의 설득에 귀국한 양 전 대법원장은 같은 해 9월 제15대 대법원장에 취임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그해 2월 대법관 퇴임 뒤 주변에 “더 이상 공직은 맡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겠다며 대법관 재직 중 면허까지 취득한 모습을 기억하는 후배 법관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임기 6년의 절반이 지난 재임 4년 차 때인 2014년부터 상고법원 도입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법원행정처장과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행정 라인을 이른바 ‘드림팀’으로 구성한 뒤 국회와 청와대를 직접 설득하려고 했다. 상고법원 설치에 반대하던 헌법재판소와 법무부, 대한변호사협회 대신 정치권과의 직접 소통에 나선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취임 전 “대법원장의 최우선 임무는 법관이 외부의 어떤 세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하여 재판할 수 있게끔 굳건한 버팀목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불명예 기록만 갖게 됐다.
지난해 6월 이후 검찰 수사가 7개월 동안 이어지면서 양 전 대법원장은 후배 판사 등과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한 지인은 “양 전 대법원장이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 김 전 원장의 전화만 받지 않았더라면…”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김동혁 기자 ha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