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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허진석]땔감으로 사라질 수 있는 ‘국보급 일자리’

입력 | 2019-01-12 03:00:00


허진석 산업2부장

일제강점기 사재를 털어 국보급 문화재들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시장에서 잘 알려진 ‘큰손’이었다. 가치 있는 물건은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매입을 했기에 좋은 물건이 시장에 나오면 골동품상들은 간송에게 먼저 가져갔다.

골동품상 박형수가 1933년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변소 가는 길에 머슴이 군불 때려고 쌓아둔 더미에서 발견한 초록색 비단보에 쌓였던 화첩이 간송에게 간 것도 그의 명성과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땔감으로 사라질 뻔했던 화첩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모음집이었다.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보물 제1949호)’으로 지금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되고 있다.

큰손의 명성과 네트워크, 미래 가치를 보는 눈이 똑같이 작동하는 곳이 벤처기업 투자 시장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가 투자에 성공하는 것도 큰손으로서의 덕이 적지 않다. 골동품 시장에서 ‘누가 소유했던 물건’이었냐가 골동품의 가치를 올리듯, 그의 투자 자체가 투자받은 기업의 가치까지 올리고 있다.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안에는 ‘벤처지주회사 설립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큰손인 대기업을 벤처투자 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안이다. 자산총액 요건을 5000억 원에서 300억 원으로 크게 줄이려는 계획이니 대기업의 참여가 늘어날 것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이 조항은 작동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펀드 조성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장의 투자 형태는 여러 기관이 돈을 모아 투자를 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펀드 조성을 금지하고 대기업이 자기의 자본금만으로 투자를 하라고 하면 최소 7∼8년 동안 매년 수십억 원의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손실이 나는 기업에 계속 돈을 쏟아 붓는 대표이사는 배임죄로 걸려들기 십상이다. 감옥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 실패 확률이 높아 이름이 ‘벤처(venture·모험)’인 기업에 돈을 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벤처지주회사 제도가 2001년에 만들어졌지만 지금 단 1개의 벤처지주회사도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여러 여당 의원과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원한 것은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이었다. 시장의 큰손인 대기업이 자신들의 사업전략과 연관된 벤처기업에 바로 투자를 하고, 대기업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벤처기업을 키우는 형태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가능성이 큰 방안이다.

그러나 금산분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벤처지주회사 요건 완화로만 갈음하려는 중이다. 금산분리의 취지가 산업자본이 일반 예금자의 돈으로 자기 사업을 키우는 것을 막자는 것인데, 벤처기업의 가치를 알아보는 기업이 몇몇 투자 주체의 돈을 모아 투자하는 것까지 막아야 할지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다시 논의해볼 만한 사안이다. 가치 있는 골동품처럼 양질의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은 미래에 든든한 일자리를 만들어낼 ‘국보급 자산’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큰손이 많이 들어오면 벤처기업은 비싼 값에 팔려 젊은 스타 창업가가 나올 확률도 높아진다. 창업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지금처럼 일일이 신경을 써가며 정책을 만드는 수고의 상당 부분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이왕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글로벌 기업의 명성과 네트워크를 애써 버릴 이유는 없다.

산업의 발전과 기업들의 경쟁 상황을 감안할 때 적절한 때에 제도적 발판을 마련해주는 일이 어느 시대보다 중요해졌다.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은 해외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만 투자를 하고, 청년 창업가들은 외국에서 먼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한발만 늦어도 국보급 자산들이 땔감으로 사라질 수 있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