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한 조 목사 부부.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1987년 2월 라이베리아 땅을 밟은 그는 햇수로 33년째 현지에서 사역 중이다. 수도 먼로비아를 중심으로 5곳의 교회를 개척했고, ‘코리안 라이베리안 스쿨’을 시작으로 10개 지역에 학교를 세웠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사이 14년의 내전이 일어났고,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내전과 에볼라 사태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떠나갈 때 그는 현지를 지켰다. 전기가 없는 곳에서 소형 발전기를 다루다 세 손가락을 잃은 그는 이국의 땅에 묘비 없는 무덤을 마련해 놨다. 현지에서 ‘파더(아버지)’로 불리는 그를 최근 서울 은평구 안디옥 교회에서 만났다.
“돌이켜 보면 무모했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이 땅을 다시 못 밟을 수 있다는 각오 속에 떠났다. 온갖 풍토병과 내전, 에볼라를 겪으면서 30년 동안 안 죽고 살아 있을 줄 몰랐다.(웃음)”
―14년의 내전을 어떻게 겪었나.
“파송 3년째 내전이 시작됐는데 처음 1개월이면 끝날 거라는 예측이 많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결국 14년이나 지속됐다. 현지인들이 내전 속에 숱하게 희생됐다. 이들이 스스로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한,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30여년을 지탱한 힘은 무엇인가.
―에볼라 사태 때는 어땠나.
“사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잠잠해져 한국으로 돌아와 안식년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바이러스가 더 확산됐다. 주변 만류를 뚫고 현지로 가려는데 인천공항 출입국사무소에서 ‘에볼라에 감염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더라. 그래서 ‘라이베리아에 무덤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에볼라에 걸린다면 절대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고 출국했다. 현지인들이 돌아온 저를 ‘파파’라고 하더라.”
라이베리아는 내전 후유증으로 1990년대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주민의 80%가 물과 전기 없이 살아간다. 대부분은 하루 한 끼밖에 먹을 수 없고, 영유아 사망률도 높다. 간호장교 출신으로 의료사역을 돕고 있는 부인 오봉명 선교사(64)는 마디가 부족한 손을 펴 보이는 남편을 바라보며 “한국이라면 손가락을 구할 수 있었는데…”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2014년 먼로비아 인근 정커팜 지역에 장애아들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그레이스 학교를 세웠다. 일반 교실은 물론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된 특수교실, 도서관, 강당, 우물 등이 들어섰다. 적금과 환갑 기념으로 들어온 축의금으로 땅을 매입했고, 밀알복지재단이 건립을 지원했다.
“소외된 자, 병자, 희망 없는 사람들을 도우라는 게 예수님의 참 뜻 아니겠는가. 이곳에는 내전과 질병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많다. 바로 그곳에 저의 빈 무덤이 있다. 내가 죽어도 그 땅의 사역은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
―건강 때문에 잠시 귀국했다고 들었다.
“지난해 10월 몸의 왼쪽 감각이 사라져 뇌경색이나 뇌출혈로 보인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나님, 평생 아프리카 선교사역을 했는데 이게 뭡니까’라는 말이 나오더라. 그런데 한국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특별한 이상은 없고 몸이 너무 쇠약해졌다고 하더라. 전기 수도 배관 목공 등 그동안 ‘노가다 선교’를 너무 많이 했다. 몸에 이상이 없다니 하나님이 또 일하라고 하시나 보다 싶다. 몸을 추스르고 다음 달 말에 출국할 예정이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