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광화문에서/김윤종]간호사 ‘태움’ 문화 그대로… ‘소 잃은 외양간’ 꼭 고쳐라

입력 | 2019-01-14 03:00:00


김윤종 정책사회부 차장

서울의료원에서 근무하던 20대 간호사 A 씨의 죽음이 최근 논란이 됐다. 그는 5일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A 씨가 가족에게 남긴 자필 유서 내용이다.

“엄마, 사랑해. 나 발견하면 우리 병원은 가지 말아줘. 엄마, 병원 사람들은 안 왔으면 좋겠어.”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에 대한 원망을 시사하는 내용 때문에 그의 죽음이 이른바 ‘태움’ 때문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이다.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폭언이나 괴롭힘 등으로 길들이는 간호사 특유의 규율 문화를 의미한다.

A 씨가 ‘태움’ 때문에 자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1년도 되지 않아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목소리가 의료계에 팽배하다. 지난해 2월 서울아산병원에서 28세의 젊은 간호사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태움’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 당시 나이팅게일 선서, 즉 ‘사람을 살리겠다’고 맹세한 간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병원 내 괴롭힘이 심하다는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대한간호협회가 간호사 7275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2명 중 1명꼴(40.9%)로 태움에 시달렸다.

정부는 지난해 3월 ‘간호사 근무환경 개선 대책’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보건복지부는 신입 간호사를 괴롭히는 가해자는 의사든, 간호사든 의료면허를 정지시키겠다고 했다. 태움을 신고 및 상담하는 ‘간호사인권센터’를 운영하는 한편, 신규 간호사 교육을 전담하는 ‘교육 간호사’를 배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1년가량 지난 현재,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비판이 현장에서 나오고 있다. 간호사들의 하소연을 토대로 취재해 보니 정부 대책 중 제대로 시행된 것이 드물었다. 우선 정부 발표와 달리 현재도 태움 가해자는 면허가 정지되지 않는다. 대책이 발표된 지 11개월이 지났지만 관련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문턱조차 넘지 못한 탓이다.

‘간호사인권센터’ 역시 유명무실한 상태다. 복지부가 간호사인권센터를 대한간호협회에 설치·운영하겠다고 밝힌 지난해 3월 당시에도 이미 협회에는 ‘고충센터’가 설치돼 있었다. 이름만 바뀐 셈이다. 이후 별다른 정부 지원도 없었다. 협회 관계자는 “괴롭히는 선배 간호사나 괴롭힘을 당하는 후배 간호사 모두 협회 회원”이라며 “제대로 된 실태조사는 물론이고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워 ‘협회 외부에 센터를 설치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간호사들의 업무 부담을 줄여 태움을 방지하기 위한 교육전담 간호사 제도도 ‘속 빈 강정’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올해부터는 교육전담 간호사가 시범적으로 국공립병원에 배치된다. 하지만 전국 병원의 약 94%가 사립병원이라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내 간호사 1명이 돌보는 환자는 4명이 넘는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2배다. 간호사 인력 부족이 근로환경 악화로 이어지고 태움 문화를 낳는 만큼 근로환경부터 개선돼야 한다고 간호사들은 강조한다.

약 1년 만에 또다시 20대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태움, 나아가 열악한 근로환경 탓으로만 돌리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본질적으로는 사건이 터질 때만 요란법석을 떨며 대책을 쏟아내지만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넘어가는 우리의 고질적인 병폐가 젊은 간호사를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았을까. 올해부터는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제대로 고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김윤종 정책사회부 차장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