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서 박종철 32주기 추모제 처음 열려 “이제 정말로 경찰 굴레 벗은듯”, 영화 ‘1987’ 감독-배우도 참석 “당시 동아일보 추적보도 생생”
물고문으로 박종철 숨진 그곳서…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마당에서 고 박종철 씨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1987년 1월 14일 대공분실 509호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박 씨의 영정(오른쪽)과 지난해 별세한 그의 아버지 박정기 씨의 영정을 들고 서 있다. 박종철 씨의 영혼을 대공분실에서 데리고 나오는 의식이다. 지난해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던 이곳에 민주인권기념관(가칭)이 조성될 예정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3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가칭)을 찾은 이주원 씨(25)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곳은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씨(당시 22세·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가 경찰의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다가 지난해 12월 26일 행정안전부로 관리 권한을 넘긴 뒤 처음으로 박 씨의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민주인권기념관 앞마당에서 열린 추모제에는 박 씨의 친형 박종부 씨와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 씨의 어머니 배은심 씨를 비롯해 시민 등 약 500명이 참석했다. 김세균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마침내 박종철 열사가 32년 만에 경찰의 굴레에서 벗어나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나올 수 있게 됐다”고 인사말을 했다. 박종부 씨는 “이 건물과 남영역이 더 이상 스쳐 지나가는 역이 아니라 기차 소리가 울리며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역이 됐으면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추모제 시작 1시간 전부터 민주인권기념관에는 시민 발길이 이어졌다. 박 씨가 고문을 받다가 숨진 509호 옛 고문조사실 앞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고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붙이는 벽은 ‘종철아 햇살 참 좋구나’ ‘선배님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 후배들이 지켜가고 발전시키겠습니다’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는 이곳에서 편안하시길 빌어요’ 등 박 씨 동료, 지인과 시민이 쓴 메모로 채워졌다.
일부 참석자는 87년 당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숨졌다’며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던 경찰과 정부에 맞서 집요하게 고문치사를 추적 보도한 동아일보의 활약을 언급했다. 당시 본보는 정부의 보도지침 강요 등 언론 탄압에 굴하지 않고 ‘서울대생 쇼크사’로 묻힐 뻔한 사건을 끝까지 파헤쳤다. 박 씨의 사망 이틀 후 ‘대학생 경찰 조사 받다 사망’ 기사를 시작으로 ‘물고문 도중 질식사’ 보도로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드러냈다. 이후 1년간의 탐사보도를 통해 경찰의 고문치사 은폐 및 축소를 속속 밝혀냈다.
박종부 씨는 과거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아일보의 ‘물고문 도중 질식사’ 기사는 한 줄기 빛이었다. 이 기사가 없었다면 민주화는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런 동아일보의 노력은 박 씨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에서 ‘윤 기자’라는 캐릭터로 형상화됐다. 박 씨 추모제엔 이 영화의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 김윤석 배우가 참석했다.
박 씨 고문치사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은 2017년 개봉한 이 영화가 700만 관객을 돌파해 사회적 관심을 모으며 남영동 대공분실의 민간화 캠페인에 불을 붙였다. 김 작가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이후 대공분실에 올 때마다 박 씨가 여전히 갇혀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제야 시민 품에 온전히 안긴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구특교 kootg@donga.com·김정훈·사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