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군에서 쫓겨나면 인맥을 동원해 다시 군에 복귀하곤 했다. 임무는 주로 정찰비행이었다. 그가 몰았던 라이트닝기는 미국의 쌍발 고속전투기를 개조한 정찰기였다. 속도는 빨랐지만 무장도 없고 다른 전투기의 엄호도 없었다. 2차대전 초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수기(手記) ‘전투 조종사’는 고독한 정찰비행의 위험을 제대로 묘사한다. 이 책은 무방비 상태로 나아가는 정찰비행이 얼마나 무모하며 두려운 임무인지를 자세히 묘사했다.
1944년 코르시카에 주둔한 정찰비행대에서 활약하던 생텍쥐페리는 일곱 번의 정찰비행 후에도 계속 비행을 하겠다고 상관을 졸랐다. 1944년 7월 31일. 그는 여덟 번째 비행에 나섰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여덟 번째 비행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생텍쥐페리의 인기는 더 높아졌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그를 친(親)독일파라고 비난했지만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은 군에서 증명을 할 만큼 했다.
어쩌면 자신의 양심과 의무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텍쥐페리는 그가 얻은 명성과 인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거운 의무감과 사명감에 짓눌렸던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지위와 명성이 높아지면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 반대로 권력과 인기를 쥐고 책임감을 놓아버리는 사람. 원래 인간계에는 생텍쥐페리 같은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 것 같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