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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롤스의 ‘정의론’과 복면가왕

입력 | 2019-01-16 03:00:00


일부 공공기관과 금융권의 채용 비리와 고용 세습이 오랫동안 뉴스에 오르내립니다. 근래에 투명하고 공정한 것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울립니다. 숙명여고를 비롯한 일부 학교에서 벌어진 내신 비리 사건도 한몫했습니다.

최근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 사교육에 의해 오염된 학생부 종합전형의 민낯을 보여주는 한 드라마가 화젯거리입니다. 외부의 힘과 배경이 개입해 개인의 역량을 왜곡하고 공정한 평가를 제한하는 현실은 분명 정의롭지 못합니다.

게다가 사법 농단 사건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으니 우리 사회에서 정의는 어디에 있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정의(正義)’는 일반적으로 ‘옳고 곧은 것’, ‘공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심각히 고민했을 정도로 정의 문제는 동서고금의 영원한 화두인가 봅니다.

오늘날 정의에 대한 이론적 관점은 존 롤스(1921∼2002년·사진)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정의’란 한 주제를 파고든 롤스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의 공존을 위해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정한 절차를 따르기만 하면 결과도 정의롭다고 믿었습니다. 절차의 공정성을 위해서는 합의 당사자들이 ‘원초적 입장’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원초적 입장’은 사회적 지위, 정신적 신체적 능력, 성격, 가치관 등이 ‘무지의 베일’에 싸여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유리한 절차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만약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성이나 인종, 종교, 출신 지역, 학벌에 의해 공정한 경쟁이 제한받는다면 롤스가 말한 절차적 공정성과 거리가 멉니다.

최근 MBC의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이 미국에 수출돼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미국 케이블 FOX 채널은 복면가왕 포맷을 수입해 리메이크작 ‘더 마스트 싱어’를 출시했습니다. 2일 첫 방송을 본 시청자가 936만 명에 달해 최근 7년간 미국 예능 프로그램의 첫 방송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tvN ‘꽃보다 할배’에 이은 두 번째 미국 진출 사례입니다. 그전에도 여러 편의 방송 포맷이 동남아 등 세계 시장에 진출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창의적 콘텐츠가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것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복면가왕에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이 프로그램이 함축하고 있는 ‘공정성’ 메시지 때문입니다. 얼굴을 완벽히 가렸으니 노래하는 자의 실력만으로 우열이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수의 권위나 선입견에 의한 평가는 일절 배제됩니다. 원초적 입장의 전제로 롤스가 가정했던 ‘무지의 베일’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돈과 권력이 공정한 경쟁을 해치고 부정 청탁과 채용 비리가 만연한 사회에서 계급장 떼고 오로지 실력으로 겨루는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매력적입니다. 예능이 차라리 현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을지 모릅니다. 인종과 출신 지역의 장벽이 여전히 존재하는 미국 사회에서도 공정함을 바라는 마음은 우리와 다르지 않겠지요.

복면가왕은 JTBC ‘히든싱어’와 유사합니다. 장막으로 가린 상태에서 진짜 가수와 노래 실력을 겨루는 포맷은 참가자와 관객 모두에게 감동을 줍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롤스가 그토록 강조한 순수한 절차적 정의에 부합하지 않을까요. 편법과 선입견의 장벽을 허물고 실력으로 당당히 경쟁하는 사회를 바라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