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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3개조 나눠 경성시내 진격… 3000여명 2시간동안 “독립 만세”

입력 | 2019-01-16 03:00:00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3·1운동 ‘서울시위’ 상황 재구성




그래픽 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식민지 조선의 경성 시내에 위치한 파고다공원에는 200여 명의 학생이 운집했다. 이들의 시선은 공원 가운데 육각당(六角堂)으로 향했다. 두루마기를 입은 한 30대 남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한 것. 10여 분간의 연설이 끝난 뒤, 우렁차게 “조선민족 자주독립 만세”를 외쳤다. 자리에 있던 학생들도 한목소리로 내뱉었다. “독립 만세!”

일제 경찰은 당시 파고다공원의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파고다공원 바로 옆에 위치한 종로경찰서 지서(파출소)의 한 순사가 공원 내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3·1 만세시위대의 집결을 확인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가 3·1 만세시위대의 상세한 이동 경로를 밝힌 논문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된 서울시위’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 3개조 나눠 경성 시내로 진격

당시 파고다공원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전문학교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 등이 학생대표 3인방이었다. 학생대표단은 천도교, 기독교계가 중심을 이룬 민족대표 33인과 3·1운동을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다.

3·1 만세시위대는 미리 계획을 세운 3개조로 나뉘어 경성 시내를 활보했다. 가장 큰 대열은 종로1가 전차 교차점(현 종각 앞)으로 가서 남대문로를 따라 남대문역(현 서울역)으로 이동했다. 이후 서울 중구 정동의 미국 영사관(현 선원전 터)∼대한문∼광화문∼조선보병대(현 정부서울청사)∼서대문정(서대문 사거리)을 거쳐 프랑스 영사관으로 향했다.

일부 시위대는 프랑스 영사관으로 들어갔다. 경성전수학교 학생 박승영은 프랑스 영사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정의와 인도에 바탕을 둔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실현시키려 하므로 귀국의 정부에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영사관 직원은 그의 말을 수락했다. 박 교수는 “당시 시위대가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점을 미리 알고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같은 경로를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나머지 한 시위대는 종각에서 무교정(무교동 사거리)을 지나 덕수궁 앞 대한문으로 진격했다. 당시 덕수궁에는 고종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경성으로 온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은)이 있었다. 시위대는 일제가 설치한 조선왕실 근위대 ‘이왕직 보병대’와 육탄전을 벌인 끝에 덕수궁 경내 진입에 성공한다. 이들은 너무나 호화로운 궁의 상황에 잠시 놀랐다. 이내 황태자 이은에게 면회를 요청했지만 끝내 거부당했다. 나머지 한 대열은 창덕궁 앞으로 향한 후 안국동을 거쳐 광화문으로 향했다.

200명으로 시작한 행진은 곧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면서 “만세만 부르면 독립이 온다”고 설명했다. 시민 중 일부는 실제로 독립이 이뤄진 것이라 여기고, 어깨춤을 추며 같이 행렬에 나섰다.

○ 최종 목적지는 조선총독부

약 2시간 동안 경성 시내를 뒤덮은 3개조는 오후 4시가 되자 한곳으로 모였다. 일본인 밀집 거주지였던 혼마치(本町·현 충무로) 입구. 이곳에 모인 이유는 자명했다. 당시 남산 자락에 위치한 조선총독부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1905년 통감부 건물을 세운 일제는 1925년 경복궁 경내에 새 청사를 짓기 전까지 총독부 청사를 남산에 뒀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조선총독부는 당시 용산에 주둔하던 조선군사령부에 급히 지원 병력을 요청했다. 혼마치 2가에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로 저지선을 구축한다. 오후 5시. 일제 군경과 맞닥뜨린 시위대는 돌파를 시도했지만 더 이상 진격하지는 못한다. 2시간여 육박전 끝에 현장에서 134명이 경찰에 붙잡힌다.

경찰에 붙잡히지 않은 시위대 가운데 1000여 명은 연희전문학교(현 서울 연세대) 앞과 마포전차종점 등지에서 밤 12시를 넘긴 시간까지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3월 1일 경성 시위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들의 애절한 외침은 1년여간 한반도 전역은 물론 간도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로 퍼져나갔다.
 
▼ 학생대표단, 나흘만에 서울역앞서 또 대규모 시위 ▼

“여학생도 다수 참여… 열기 확산”

1919년 성공적인 3·1 만세시위를 이끈 학생대표단은 제2의 만세일로 3월 5일을 지목했다. 3일 고종의 인산(因山)을 앞두고 있어 2일에는 시위를 자제했다. 4일 역시 고종의 하관식이 예정돼 있었다. 또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이 고종의 국장을 마친 뒤 5일 대거 남대문역을 통해 귀향할 것으로 보고, 많은 인파의 참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대표단의 계획은 예상대로였다.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서울역) 앞 광장에는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였다. 조선총독부 추산 4000∼5000명, 조선군사령부 추산 1만 명, 학생대표단 자체 추산 5000∼6000명이었다. 오전 9시 2분쯤 양복을 입은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이 인력거 위에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곧이어 다른 인력거에 탄 보성전문학교의 강기덕이 마찬가지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행렬이 움직였다.

당시 일제는 숭례문 앞에서 시위대 행진을 막으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3월 5일 만세시위에는 1일과 달리 뒤늦게 소식을 접하거나 학생대표단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여학생들도 다수 참여한 게 특징”이라며 “학생들은 만세시위 이후에도 계속해서 격문과 지하신문을 만들어 3·1운동의 열기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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