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갑질’ 간호사 자살이후 11개월, 달라지지 않는 현실
○ ‘태움’ 사태 이후 11개월… 여전한 괴롭힘
지난해 2월 서울아산병원의 한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가까이 지났다. 당시 '태움' 논란이 제기됐지만 일선 병원에서는 아직도 태움의 악습이 계속되고 있다.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폭언이나 폭행을 일삼는 악습을 말한다.
2년 차 간호사 B 씨는 지난해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있었던 환영회 자리에서 공개적인 면박을 당했다. 선배 간호사는 B 씨에게 “우리는 너를 환영하지 않는다. 집에 가라”며 몰아세웠다. 이 선배는 수간호사가 회식 자리에 도착한 뒤에야 모욕에 가까운 막말을 멈췄다. 얼마 뒤 이 선배는 B 씨에게 사직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B 씨는 “그 선배가 나를 따로 불러 ‘너랑은 일 같이 못 하겠다’ ‘네가 퇴사하는 모습을 꼭 봐야겠다’며 40분 넘게 말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 2년 차 간호사 D 씨는 동료 간호사들 사이에서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혔다. 주사기 눈금을 잘못 읽는 바람에 선배에게 주사액 용량을 잘못 말하는 실수를 한 뒤부터다. D 씨는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정확한 주사액 용량을 선배에게 다시 알렸지만 소용없었다. “넌 거짓말을 한 거다”며 몰아붙이던 이 선배는 주변 간호사들에게 D 씨가 거짓말을 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2017년 12월부터 1년 동안 ‘태움’ 등의 인권침해 사례가 166건 접수됐다. 직장 내 부당행위와 관련한 신고를 받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도 ‘태움’ 피해를 호소하는 간호사의 신고가 매달 접수되고 있다.
○ 각종 대책 내놨지만 미봉책에 그쳐
보건복지부는 간호협회에 ‘간호사 인권센터’를 설립하고 신입 간호사에 대한 교육관리 가이드라인 제정 등의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간호협회는 고충 상담만 해줄 뿐 태움의 피해 간호사가 소속된 병원에 시정 조치 등의 권고조차 할 수 없다. 간호협회 관계자는 “협회는 법적 권한이 없어서 태움 사례가 접수돼도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한계가 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별도 기구를 설치하는 등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간호 인력 부족 등의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것도 태움의 악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환자 수에 비해 간호사가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선배 간호사들은 신입 후배들을 업무에 빨리 적응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태움과 같은 악행을 일삼는 것이다. 간호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종합병원 간호사 1명당 환자 수가 19명에 달한다. 일본(7명), 캐나다(4명)와 비교하면 2∼5배 많은 환자를 돌봐야 한다.
김하경 whatsup@donga.com·사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