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트럼프와의 면담을 앞둔 사람들에게 “트럼프를 가르치려 하지 마라. 그는 교수들, 먹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했다는 얘기다.(밥 우드워드 ‘공포’)
지난해 6·12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도 트럼프는 그렇게 막판 벼락치기 공부를 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일은 준비가 중요한데, 난 평생을 준비해 왔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백악관 측은 트럼프가 매주 10시간씩 준비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비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는 알맹이 없는 합의문과 장황한 기자회견에서 곧바로 드러났다.
트럼프의 롤 모델이라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디테일에 무관심하고 글보다 말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도 그런 레이건의 평판을 염두에 두고 미소(美蘇) 정상회담을 서둘렀다. 하지만 레이건은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정독했고 러시아사 전문가의 특별과외를 받기도 했다.
트럼프 참모들은 그간 철저한 사전 실무협상을 통해 대통령의 ‘본능 외교’ 리스크를 줄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북한은 우선 정상회담 일정부터 잡자며 사실상 실무협의 없이 정상 간 담판으로 직행할 것을 고집해 왔다. 김정은이 노리는 것도 과거 고르바초프의 속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 6개월간 철저히 준비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자신의 카드를 내비치며 미국의 반응을 떠봤고, 시진핑 중국 주석을 두 차례나 찾아 코치도 받았다. 지난해 북-중 간 ‘전략·전술적 협동’을 강화하기로 했던 약속대로 연초에 다시 베이징을 방문해 ‘비핵화 협상 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북-중 간 ‘공동 연구·조종’이란 결국 북-미 협상의 로드맵, 즉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조치를 놓고 주고 받으며 구체화할 이행계획을 중국과 먼저 맞춰 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엔 중국 측 전략기조가 반영될 수밖에 없고, 주한미군 철수 같은 민감한 한미동맹 이슈에 중국의 입김이 작용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발등의 불은 우리에게 떨어진다. 문 대통령도 북-미 회담을 통한 교착상태 탈출을 기대하며 지켜만 봐선 안 된다. 물론 지금 트럼프에게 전화라도 걸라치면 당장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어떡할 거요”라며 채근부터 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있다간 수습 불가능한 낭패를 볼 수 있다. 모든 뒷감당도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