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29화>대구 신명여학교
신명고와 성명여중 교내에 있는 ‘신명 3·1운동 기념탑’. 교내에 3·1운동 기념탑을 세운 것은 신명고가 처음이다.
○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
신명고 김홍구 교감이 16일 신명고 역사관에서 만세운동 당시 상황과 참여 학생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구=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신명여학교는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이후에도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큰 활약을 펼쳤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작됐다. 이때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가 교사 임봉선(당시 22세·6회 졸업생)과 이재인(31세), 이선애(22세)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일제의 압제에 있는 우리나라를 자주독립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급선무요 우리의 살길이니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며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또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갖춘 뒤 이날 낮 전교생 5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 밖에 모였다.
○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대구 3·8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회고록에 남긴 고 김학진 할머니. 김 할머니는 당시 14세로 신명여학교 1학년이었다.
이윽고 3월 8일 약속의 날이 오자 학생들은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약속한 장소까지 가는 것이 큰일이었지만 대야에 세수수건을 담아 빨래하러가는 것처럼 꾸며 학교를 벗어났다. 학생들은 교문 밖 개천에 이르러서 대야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약속장소를 향해 뛰어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 행렬 속으로 뛰어들어가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인근 주민,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장엄한 행렬이 됐고, 얼마 후 대구경찰서에 당도했다. 모인 사람들은 행렬을 멈추고 있는 힘을 다해서 경찰서가 떠나가라는 듯이, 땅이 꺼져라,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댔다. 김 할머니는 당시 상황을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된 신명여학교 학생들은 약 20여 명. 상당수 청년들은 일본 군경이 체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손을 들고 자진해서 묶여갔다. 김 할머니는 “만세운동에 나왔을 때는 체포돼 감옥에 들어갈 것을 각오하고 나왔는데 너무 어려 보였는지 일본 군경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며 “잡아가지도 않아 어떻게 할지 모르고 서 있는데 상급생 언니가 내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보호해줬다”고 기록했다.
김 할머니는 “만세운동 이후 검문검색이 심해서 외출도 못했는데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 많은 동포들이 체포돼 감옥에 들어갔다는 굉장한 소식을 들었다”며 “우리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도 다수가 잡혀 들어가 학교는 휴교됐고 기숙사는 텅 비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할머니와 어머니는 어린 것이 그 인파 속에서 밟혀죽지 않고 살아왔으니 감사하다고 반가워하셨으나, 아버님께서는 후에 말씀하시길 감옥에 안 들어가고 왜 피해왔느냐고 꾸지람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나 자신도 생각하면 더욱 용기를 내 손을 쳐들고 자원해서라도 잡혀가서 나라를 위해 옥고도 좀 겪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때때로 일었다”며 당시 심정을 기록했다.
이 같은 신명여학교의 3·1만세 운동은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애국부인회(회장 김마리아)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회장 김활란)의 활동을 통해 계승·발전됐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신명여학교 교사 출신인 유인경과 1회 졸업생인 이금례 등이 주축이 돼 독립운동 자금모집, 독립운동원의 보호, 독립운동 유가족의 생계보조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발각돼 조직원 전원이 체포되는 아픔을 겪는다. 조선여자기독청년회는 1회 졸업생 임성례, 7회 졸업생 추애경, 9회 졸업생 이영현 등이 주축이 됐는데 여권신장운동, 농촌계몽운동, 절제 운동 등을 위주로 활동했다.
○ 학생들이 주도한 3·1기념탑
이런 신명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교 안에 3·1운동 기념탑을 세우는 원동력이 됐다. 신명 3·1운동 기념탑 건립은 1972년 3월 민족 주체사상을 고취하고 애국정신을 함양하며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학생들은 용돈을 절약해 1인당 60원씩 갹출해 건립비용에 보탰다. 탑 모양 설계는 미술교사이던 김익수 선생이 만든 2개 모델 가운데 하나를 전교생의 투표로 선정했다. 탑에 새겨질 명문(銘文)은 당대의 시인 박목월이, 글씨는 서예가 강선동 선생이 맡았다. 또 당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갑성 옹이 축전을 보내고 향나무 한 그루를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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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 여성단체-문학 활동 통해 치열한 저항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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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석은 23세 때 신명여학교를 떠나 평양으로 가서 오빠 차리석과 교육사업을 펼치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흥사단에 참여하고, 1921년에는 재상해유일학생회에서 활약했다. 이후 30세인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 단장을 거쳐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1926∼1928년)을 역임했다. 그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 교사를 했는데 학생들에게 한국 혼을 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모금에도 노력했다. 1931년에는 대한인국민회에 들어가 3·1절 기념식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1932년 3월 21일 불과 40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정부는 2016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항일 여성 운동가이자 여류 작가인 백신애 선생(1908∼1939·신명여학교 중퇴)도 신명여학교 출신이다. 그는 부친이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껴안는 저항의 삶을 살았다.
그는 영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드러나 교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두 단체 활동을 멈추지 않으며 상하이와 시베리아를 넘나들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작품에서 농촌의 궁핍한 삶과 여성에게 침묵과 순종만을 요구하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및 조혼의 폐단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나의 어머니’ ‘꺼래이(일제강점기 러시아인들이 조선인을 비하해 부르던 말)’ ‘복선이’ ‘호도’ 등 소설 23편과 산문 38편을 남겼다. 그는 31세인 1939년 췌장암이 악화돼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현재 백신애기념사업회가 ‘백신애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
대구=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